당신의 사전
시작은 이랬다. 당신의 사전 책 표지가 여자의 목선이 부각된 사진이라 남자들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기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고. 나는 이번 브런치북프로젝트 대상작 중에 당신의 사전 표지가 제일 마음에 드는데? 내가 말했다. 그럼 내가 내일 지하철에서 책 들고 찍을게요.
처음엔 그저 사진만 찍을 생각이었다. 표지만 찍을 수 없어 책을 열었다. 아주 조금 읽어 내려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하루 일정을 바꿨다. 하지만 이 책이 바꾼 건 나의 일정 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책을 전투적으로 읽어왔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고 또 새로운 책으로 넘어갔다. 그런 호흡으로 이 책을 처음 열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잰걸음마저 재촉하는 나를 수많은 문장들이 붙잡았다. 시를 읽는 속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하는 속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에 수많은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동안 다정으로 모두 다 채우고 싶어 모른 척 외면해왔던 불안, 그리움, 슬픔을 위하여.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애써 내가 지우고 싶었던 마음들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어 한동안 보이지 않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그 마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 톡톡 어깨를 건드리며 인사를 했다.
지하철에서도 읽고, 카페에서도 읽고, 버스에서도 읽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잊었던 마음들은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왔다. 그대로 더 읽다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직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다 눈물을 보일만큼 솔직하진 못한 사람이라 차마 한 곳에서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못했다.
나는 꽤나 스스로에게 솔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난 비겁했구나. 아직도 나는 내 마음을 알기는커녕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구나 자책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갈라진 도자기 반죽을 대하는 선생님의 말이 나왔다.
"괜찮아요 이럴 땐 갈라진 쪽을 이렇게 만져주면 다시 괜찮아져요." 반죽처럼 갈라진 표면을 물을 먹여가며 조심스럽게 다시 만지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요, 다시 괜찮아져요.
당신의 사전을 다 읽고 나면, 사전 속의 단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나의 웃음이 된다. 나의 눈물이 된다. 나의 마음이 된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들에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녕 슬픔아. 안녕 외로움아. 아직도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다시 그 마음들을 안아야겠다. 더 이상 마음속 어딘가에서 잊혀진 채 물러지지 않도록. 비겁한 내가 내 마음을 또다시 어딘가에 숨겨놓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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