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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욱 Oct 30. 2019

비 오는 날에는 매장 앞에 박스를 내어놓는다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참 많은 변화가 있지만, 피부로 느끼는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비 오는 날'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출퇴근할 때의 그 번거로움에 비를 귀찮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근을 하지 않는 쉬는 날은 조용히 토독토독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 오는 날이 주는 감성에 마음껏 취하는 호사를 부리기도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 그런 호사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오히려 새벽 잠결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아, 비 오면 장사 안되는데'같은 생각이나 하는 퍽퍽한 생계형 마트 삼촌이 된 지 오래다. 그날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매출 걱정하는 또 다른 비 오는 날일 줄만 알았다.


평소에는 별로 그런 생각도 안 하면서 괜히 그날은 감성 메마른 마트 삼촌이라도 3분 정도는 감성 충만한 아저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나마 시끄러운 매장의 소리를 벗어나 조용히 빗소리를 듣기 위해 문을 나섰다.


토독토독.


'이것도 나쁘진 않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빗소리 사이로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야옹.


까만 고양이였다. 얼마 전 길을 잃고 우리 매장 안까지 들어왔던 그 길고양이였다. 여기저기를 계속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니, 또 털이 조금 젖어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비를 피할 곳을 찾다 다시 또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슬렁슬렁 걸어가는 고양이를 가만히 지켜봤다. 자꾸 보면 정든다던데 그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괜히 반가워졌다. 천천히 고양이 곁으로 다가갔다. 지난번 구조 때 재미있게 놀아줘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차디찬 빗속에서 또 다른 포유류를 찾은 게 기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까만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고 내 근처로 다가왔다.


고양이를 쓰다듬어주며 털끝에 맺혀있는 빗방울을 툭툭 털어주었다. 고놈 다시 봐도 귀엽게 생겼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까만 고양이는 내 다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기 몸을 비비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눕기도 했다. 마치 '너, 내 집사 할래?' 하듯이.


집사 간택은 고양이님의 일이라더니 처음 받아보는 간택에 신나게 고양이님을 긁어 드리다 보니 3분만 누리려던 빗속의 호사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이제 그만 다시 먹고사는 일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 빗방울이 묻은 내 손끝을 차디찬 바람이 지나갔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내게는 3분짜리 호사였을 수도 있는 그 순간이 까만 고양이에게는 냉랭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이었음을.


빗속에서 만난 새 친구를 그냥 차디찬 바람 가운데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 매장에 있는 박스 중 가장 아늑해 보이는 박스를 가져다주었다. 까만 고양이는 처음엔 조금 경계하는 듯하더니 맘에 들었는지 이내 곧 그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마치 원래 그 박스에 살던 고양이인 것처럼 눈을 껌뻑 껌뻑 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는 또 웃음 지었다.


다시 생업 전선에 돌아와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까만 고양이가 생각났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몇 번이고 매장 앞을 서성였다. 아닌 척 지나가며 슬쩍 던지는 시선 끝에 까만 고양이가 잘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좋았다. 그렇게 지금껏 알지 못했던 비 오는 날의 새로운 호사를 부렸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밖을 나가보니 까만 고양이는 인사도 없이 박스집을 떠났다. 아마도 원래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갔겠지. 몇 시간 전만 해도 고양이가 없는 게 너무도 당연했던 그 자리가 괜히 쓸쓸해졌다.


며칠이 지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까만 고양이는 다시 조용히 나타났다. 지금도 가끔 밤이 되면 까만 고양이는 비 오던 그 날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매장 근처를 휘적휘적 돌아다닌다. 그리고 나는 또 조용히 다가가 까만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가끔은 네가 날 기다리고 대부분은 내가 널 기다리며 그렇게 약속 없이 우리는 가끔 만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기쁜 일이 될 수 있는지 몰랐다.

이제 비 오는 날이면 까만 고양이를 기다리며 고양이 박스를 내놓기로 했다.

메마른 마트 삼촌도 비 오는 날 누릴 수 있는 호사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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