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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욱 Nov 12. 2019

아픈 사람한테 왜 아프냐니?

30대 아저씨가 본 82년생 김지영

* 워낙에 젠더갈등이 첨예한 시기라 미리 밝혀둔다. 나는 이 영화가 무조건 여성이 남성보다 더 힘들다고만 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팀과 여성팀으로 나눠 서로의 불행 배틀을 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읽어내는 건강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 중 이런 문구가 있다. '자신을 고백함으로써 타인의 지평을 넓힌다.' 나는 이 영화를 김지영 씨의 고백으로 인식한다. 이 영화를 통해 30대 남자로서 그동안 내가 머리로만 알아오던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려 짐작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비약이나 과장으로 인식할 수도 있음을 알고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시도만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조금이나마 더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글을 쓴다.


아주 평범한 삶

김지영 씨는 이름부터 평범하다. 아니, 사실은 김지영 씨는 아주 평범하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살만한 사람'에 속한다. 서울 경기권 어딘가에 아파트가 있고, 남편도 한눈 안 팔고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지영 씨는 비록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됐지만 대학 잘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인정받던 커리어우먼이었다. 이 가정은 가난에 찌들어있지도, 남편이 뭔가에 한눈팔려 가정을 내팽개치지도 않는다. 김지영 씨의 삶이 드라마 속 재벌 회장님의 삶처럼 어마어마하게 대단하거나 더 이상 필요한 것 없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그 정도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보통 이상의 '평범한 삶'이다.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것을 굳이 꼽자면 남편인 정대현 씨다. 내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면, 세상에 정대현 씨 같은 남편이 존재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육아를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동료들이 '육아휴직은 커리어의 끝이다'라고 말을 해도 주저 없이 '그럼 내가 육아휴직할게'라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김지영 씨가 아픈 것이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닐지'라고 슬퍼하는 모습, 진심으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 영화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요소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정대현이라는 남편이라는 생각을 했다.


슬픈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어느 정도 살만하고 저렇게 대단한 남편을 만나도 렇게 힘들다고? 일반적인 영화들은 평범한 일상에 무언가 균열이 가고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특별한 균열 없이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불행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걸까.



아주 평범한 슬픔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연속해서 나열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각 에피소드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끝 부분이었다.


사무실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카메라를 발견하고 난 뒤 지영 씨와 동료들은 대화를 나눈다. '급할 때를 대비해 요강이라도 들고 다녀야지', '애기 남는 기저귀 있으면 좀 빌려줘'라는 가벼운 농담 끝에 이어지는 깊은 한숨을 지켜보자니 참 슬펐다. 그동안 내게는 그저 신문 기사 속 이야기, 사회 이슈 중 하나였을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이처럼 너무나 일상적이라는 사실, 그런 가벼운 농담으로 넘기는 것 이외에는 한 개인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많이 슬펐다. 대화는 가벼운 농담으로 끝을 낼 수 있지만, 우리를 둘러싼 이 현실은 그렇게 가볍게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가벼운 농담 끝에 이어져 무겁게 내려오는 한숨의 무게가 그제야 내게 전달됐다.


서울대 공대를 나온 엄마가 기 구구단 가르치려고 대학 나왔다는 말을 하고, 연기 전공한 엄마가 아기 책을 읽어 주기 위해 연기를 전공했다고 말한다. 그 대화의 마무리에는 지나가듯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니, 근데 이게 또 희열이 있어.' 물론 그 희열을 절대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연기전공 엄마가 대학시절 열정 넘치게 꿈꾸고 준비해온 과정이 그 희열만을 위하지는 않았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엄마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전념하다 경력단절하게되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씩 상상하게 됐다.


그게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기에 불행한 나의 주변 사람들을 이제야 인식하게 됐다.


그 평범함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짐작해본다

이 영화는 그동안 내가 머리로만 알아왔던 이야기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의 어머니가 될 수도, 나의 동생이 될 수도,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어설프게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세이는 그저 짐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해한다. 자신이 짐작하는 것이 다만 짐작에 그칠 뿐 진실은 아니며 진실에 가깝지도 않으리란 사실조차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 짐작을 거듭해, 최선을 다해 오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염승숙, 세계는 읽을 수 없이 아름다워

얼마 전 읽은 소설에서 이런 구절이 나왔다. 우리는 완전한 이해까지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짐작하고 오해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에 가까워진다.


시대는 그래도 조금은 바뀌었고, 조금씩은 바뀌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아버지 세대에는 '함부로 웃어주지 마. 치마가 짧잖아.'라는 말 외엔 다른 할 말을 몰랐을지 몰라도, 이제 우리는 조금 다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고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고쳐가야 할 부분은 잔뜩 남아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정대현 씨는 이런 대사를 말한다.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니' 나는 이 대사가 이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를 묻지 않고, '너만 아파? 나도 아파!'라고 말하지 않고, '그동안 많이 아팠겠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순간, 우리는 좀 더 능동적으로 짐작하고 조금이나마 덜 오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짐작과 오해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불가능에 가까워보이던 이해에 점점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동안 무심했던 30대 아저씨인 나에게 '남자들이 뭘 알아. 여자는 무조건 불행해.'를 말하려 하기보다 '짐작과 오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달라'를 말했다고 생각한다.


지영 씨가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었으면

사실 이 영화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보고 나면 괜히 가슴만 답답할 것만 같아서. 하지만 소설과 다른 영화의 결말에 영화관을 나오는 그 마음이 그리 답답하지는 않았다.


명확하게 비추지는 않지만 김지영 씨의 집에는 민음사의 세계문학 전집이 안방에도, 거실에도 곳곳에 놓여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국문과 출신의 김지영 씨는 아마도 참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불행히도 김지영 씨는 영화를 통틀어 단 한 장면에서 조차 책을 읽지 못한다. 영화 내내 지영 씨는 육아와 가사노동 때문에 계속 움직 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그녀는 읽고 쓰는 '릿한' 사람들을 위한 잡지 Littor에 등장하는 '문학하는 사람'이 된다. 김지영씨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 됐다. 그 장면에서 영화 내내 보기 쉽지 않았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김지영 씨를 볼 수 있다.


부디 영화 속 김지영 씨는 자신이 좋아하던 글을 쓰며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정대현 씨도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한 편이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고 아름답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딸 아영이와 놀아주며 '아영아, 과자 말고 밥 먹어야지', '음... 그럼 난 고래밥.' 하는 대화도 나누면서.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 부부가 당신 부부만의 나름의 방식을 찾으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이 영화 하나로 영화처럼 뒤집어지고 갑자기 모두가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오해와 짐작을 반복하며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한, 언젠가는 그런 꿈만 같은 날이 올 수도 있지않을까. 아영이의 삶은 김지영 씨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겨우 오해와 짐작을 시작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실의 김지영 씨들도 언젠가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기를 노력하며 기도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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