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트레바리 북클럽 '튜링의 아틀리에'(2020. 01.~07.)에서 진행된 창작 워크숍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작업에 관한 노트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테드 창 SF 단편집 『숨』에 수록된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세 바그다드의 상인인 푸와드가 칼리프를 알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푸와드는 과거 우연히 연금술사 바샤라트를 만나 20년 간격으로 시간여행이 가능한 '세월의 문'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푸와드는 바샤라트를 통해 이전에 이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시간여행 이야기를 듣게 되고 푸와드 본인도 그 문을 통과하여 시간여행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시간여행을 하던 푸와드는 우여곡절 끝에 칼리프를 알현하게 되고 바샤라트로 부터 전해 들은 다른 이들의 시간여행 이야기와 본인의 시간여행 이야기, 그리고 본인이 느낀 바를 전하며 소설은 끝을 맺게 됩니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시간여행물처럼 한 인물이 과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으로 이동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시간의 문을 통해 다양한 시점과 장소에 복잡하게 등장합니다. 게다가 바샤라트가 푸와드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또 푸와드가 칼리프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다중 액자구성으로 인해 더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테드 창은 그 명성에 걸맞게 이 소설의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아주 치밀하게 설계했습니다. 그러나 이 복잡한 구조 때문에 독자들이 한 번에 이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튜링의 아틀리에 클럽에서는 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조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유지원 님이 작성해주신 링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튜링의 아틀리에 멤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수행했는지에 대해서 설명 드리려 합니다.
3중 액자구조
이 소설은 3개의 액자(Frame 1, 2, 3)가 중첩된 3중 액자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Frame1 레벨의 하산, 아지브, 라니야 각각의 이야기를 듣는 바샤라트, Frame2 레벨의 바샤라트-푸와드 간의 이야기, Frame 3 레벨의 푸와드-칼리프 간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3중 액자구조 팀은 각각의 이야기(Tale1,2,3)가 마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연극처럼 느껴지길 원했습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네모반듯한 액자배경 안에 각각의 이야기를 배치하는 것보다 연극무대의 형태 속에 각각의 세트가 존재하는 것처럼 점층적으로 깊이감을 주는 표현기법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Tale과 각 Frame 1,2,3은 높이를 다르게 설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Frame 3에서 Frame 2로, Frame 1로 그리고 Tale레벨로 점점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깊이감이 느껴질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또한 각각의 레벨에 맞게 '성채 외벽 - 성채 내 건물 - 건물 내부 - 방'의 모습을 구현했습니다.
Frame 3(푸와드-칼리프) 레벨은 3중 액자구성 중 가장 밖의 이야기이므로 성채의 외벽과 같이 표현하고, Frame 2(푸와드-바샤라트) 레벨은 중간의 이야기이므로 성채 내의 건물의 형태로 표현했으며, Frame 1(각각의 이야기) 레벨은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샤라트를 통해 듣는 것이므로 건물 내부 느낌으로 표현, Tale 레벨은 건물 안의 방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설계했습니다.
또한 액자구성을 표현하기 위해 수학적인 비율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가장 안쪽 Tale과 Frame 1 레벨은 일반적인 Frame의 기본 종횡 비율인 4:3 비율로 제작했습니다. 세 개의 각기 다른 Frame 1을 포함하고 있는 2와 3은 현대의 액자라고 할 수 있는 16:9 비율로 제작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시간의 흐름 팀은 각각의 이야기(Tale) 를 자세히 표현하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현실의 피막에는 마치 나무에 뚫린 벌레구멍처럼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어 그는 그것들을 찾아냅니다. 그 구멍을 찾아내면 유리 직공이 녹은 유리 덩어리를 잡아 당겨 목이 긴 파이프를 만들듯이, 구멍을 키우고 잡아당겨서 한쪽 입구에서는 시간이 마치 물처럼 흐르게 하고 반대쪽 입구에서는 시간을 시럽처럼 걸쭉하게 만듭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소설 속에 시간의 문의 작동원리는 시간의 흐르는 속도를 변형시켜 마치 물과 시럽처럼 흐르게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큰 판과 작은 판은 특정 시대의 시간을 의미하며 실의 간격 차이는 시간의 유속 차이를 반영합니다. 느슨한 간격과 촘촘한 간격의 차이를 통해 소설에서 묘사된 시간의 유속 변화를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각각의 종이는 라니야(Tale3)와 핫산(Tale1)을 의미합니다. 라니야는 핫산의 아내로 중년의 라니야와 노년의 라니야는 합심하여 과거로 돌아가 위기에 빠진 젊은 핫산을 구합니다. 라니야가 시간여행을 하며 핫산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처럼 구조물도 복잡하게 얽혀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여기서는 넓었던 종이의 간격이 점차 좁아지는 방식을 이용하여 시간의 유속 변화를 표현했습니다.
아지브(Tale2)는 미래의 자신에게서 금화를 훔쳐오는 인물입니다. 아지브는 미래의 자신에게서 금화를 훔쳐간 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금화를 훔쳐갈 또 다른 자신을 기다리며 본인은 쓰지도 못할 금화를 채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갈색 구멍 뚫린 종이는 그의 인생 전반에 흐르는 가난을 의미하며, 금색 종이는 청년 아지브가 훔친 금화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금색 종이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구겨진 질감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시간여행과 금화를 훔쳐가는 것이 성공적이지 않음을 상징했습니다.
밧줄직공인 핫산(Tale1)은 미래의 자신을 만나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듣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래의 핫산은 시간여행을 온 핫산에게 의도적으로 소매치기 당할 일을 미리 말해주지 않습니다. 시간여행을 온 핫산은 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따지지만 미래의 핫산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멋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를 깨달은 핫산은 아지브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결국엔 부자가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핫산의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겹의 레이어를 이용했습니다. 또한 아지브와는 달리 점점 구체화되는 성공적인 그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뒤로 갈수록 더 밀도가 높고 단단한 종이 재질을 사용해서 그의 인생이 더 짜임새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구조
시간과 공간구조 팀은 소설 속 배경인 바그다드와 카이로, 그리고 20년의 기간을 두고 일어나는 각각의 사건들을 표현했습니다.
세월의 문은 바그다드와 카이로 두 곳 모두에 있습니다. 세월의 문은 작동 원리상 만들어진 20년 후 미래로는 갈 수 있지만, 만들어지기 전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바그다드에서는 푸와드가 바샤라트와 만나고, 푸와드가 칼리프와 만납니다. 핫산, 아지브, 라니야 각각의 이야기(Tale)는 모두 카이로에서 벌어졌습니다.
소설 속에 칼리프가 있는 바그다드는 조화로운 평화의 도시라고 묘사되기에 아랍식 궁전의 모양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현기증 나는 미로의 도시로 묘사되는 카이로는 여러 가지 패턴이 존재하는 모양으로 복잡한 도시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각각의 등장인물은 각각 다른 색의 실로 표현함으로써 그들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시간 여행했는지 또 어느 도시에서 어느 도시로 이동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20년 1월부터 7월까지 총 5번의 모임을 하고 3권의 책(숨, 떨림과 울림, 종이의 신 이야기)을 함께 읽었습니다. 디자이너, 연구원, 편집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모임 시간외에도 단톡방에서 틈틈이 작품 구상을 함께했고 클럽장님이 따뜻하게 이끌어 주시고 멤버들이 모두 힘을 모은 결과 멋진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시간의 문은 이를 이용하더라도 과거나 미래를 전혀 바꿀 수 없습니다. 바샤라트는 시간의 문이 긴 복도를 돌아가는 것보다 목적하는 방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왕궁의 비밀통로와 같은 역할을 할 뿐 도착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푸와드는 시간여행을 하고 그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 알게 됐다'라고 칼리프에게 말합니다. 과거로의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푸와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면서 말이죠.
튜링의 아틀리에 작업을 하는 동안 저도 이 소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읽었다면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수준으로 테드 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능동적으로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눠주신 동료 멤버 분들 덕분입니다. 함께 읽고 함께 생각을 나눠주신 덕분에 저도 왕궁의 비밀통로를 통과하는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훌륭한 멤버분들의 도움으로 이번 작품 활동을 하면서 클럽장님이 말씀해주셨던 '온몸을 다 써서 책 읽기'를 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클럽장 유지원 님과 파트너 태유정 님, 그리고 함께해주신 모든 멤버 분들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만든 사람들
클럽장 : 유지원
파트너 : 태유정
사진 : 박석규, 강종원 외
조명 : 강종원
'시간의 흐름'팀 : 김지호, 박민혜, 양인정, 조소희
'3중 액자 구조'팀 : 김경욱, 소호현, 유지욱, 이종민
'시간과 공간의 구조' 팀 : 강종원, 송호주, 오세미, 이혜원
강종원 님과 소호현 님의 재능과 열의에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