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우리
요절한 조선왕조의 여섯 번째 왕에 대한, '국민적 애도'라고 해야 하나 '뒤늦은 충정'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북한만 아니라면 한반도에 있는 모든 왕조의 흔적들을 주입시키겠다는 각오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강원도를 휘젓고 다녔었다. 경주, 공주, 전주, 애월, 영월 등 박물관과 유적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피터팬에서는 팅커벨의 요정가루(Pixie Dust)와 '행복한 기억'만 있으면 공중부양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믿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바라건대 힘들게 끌려다니느라 행복하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간간히 사준 과자, 바나나우유, 하리보, 치킨, 돈가스, 짜장면, 아이스크림, 그리고 정말 드물게 사준 가성비 최저치 구슬 아이스크림 등이 부모의 도리를 다 한 증좌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영월에 있는 청령포는 우리집실록 강원도편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횡성을 소고기도 먹지 않고 통과한 후, 조선왕조의 잔악한 한 대목을 학습시키고자 인근 별마로천문대와 패키지로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사극 드라마에서 어린 단종이 세조를 향해 "숙부, 살려주시오."라고 애원하던 장면이 떠올랐었다. 결국 숙부는 어린 조카를 죽였다. 사람들이 그 이례적인 사건을 두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했다는 자취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모두 죽기 전이 아니라 죽은 뒤의 이야기다.
평소 방송에서 재밌는 입담과 특이한 인생관으로 주목받던 영화감독 장항준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단종의 죽기 전 이야기를 각색하여 잘 풀어냈다. 명배우들의 명연기와 다분히 한국적인 웃음 포인트, 요즘은 정치라고 부르는 권력자들의 위선과 탐욕, 우리가 마주한 적 있는 나이 어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본질적 슬픔이 잘 표현되어, 영화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아내와 다시 찾은 청령포는 한산했던 이전의 방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주차장은 모자랐으며, 영월군민 모두가 주차안내 강제노역에 차출된 것 같은 모습이었고, 표를 사느라, 나룻배를 타느라 문자 그대로 긴 뱀 같은 줄이 늘어서 있었다. 포기가 빠른 우리는 즉시 노선을 변경하여 강 건너 전망대에서 청령포를 조망하고, 다분히 상업적으로 보이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방문 일정을 마무리했다. 백성들이 그때도 이렇게 모였다면 피지배자들의 민란을 통해 지배자 왕조의 적통을 유지하는 사상 초유의 아이러니가 남을 뻔했다.
권력은 무섭다. 스미골은 절대반지를 끼기 위해 친구 데이골을 죽였고, 세조와 한명회는 실존하는 왕, 단종을 죽였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것이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등한시한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에야 다시 그리워한다.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는.
단종이 죽고 난 뒤, 부모님을 여의고 난 뒤, 누군가 죽음으로 괴로움을 내려놓고 난 뒤,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함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쇼크임에 분명하다. 강도 높은 그 자극이 치트키처럼 잊은 채 살고 있던 중요한 것을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영약하다.
후끈 달아오른 청령포의 열기를 보며, '있을 때 잘하자.'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되뇌어 본다. 다 커버린 아이들이 혹시 따라와 준다면 다시 찾은 횡성에서는 꼭 한우를 먹이고, 디저트로 구슬 아이스크림도 먹이겠다. 있을 때 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