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이 오듯 느리게, 또 느닷없이

슬픈고 하얀 소금을 따라간 여행

by 멧별

소설 ‘소금’


작가는 근현대 대한민국이라는 프리즘에 투영되어 살아온 많은 아버지들을 노예로 인식한다. 등에 착취의 빨대가 꽂힌 모습은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그 끝에는 놀랍게도 가족이 있다. 소설스러운 비약 같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완전한 비현실도 아니다.

책 표지

근자의 여성 입장에서는 저 아버지들과 동시대를 살며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매 맞고, 때론 배신당한 어머니들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할지 모르겠다.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담은 ‘소금2’ 또는 ‘설탕’ 같은 후속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소설의 기저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 즉 물욕이 깔려 있다. 물욕에 중독된 가족, 물욕을 충족시켜달라는 가족의 요구,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책임감이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 그 회전은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반경이 커진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의 실종이라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소설 속 설정과 딱 맞아떨어지는 가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도 다르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나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자발적 실종을 선택했지만 나는 아직 버티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큰 구멍을 가슴에 남긴 채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소설의 한 대목을 옮긴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비 문명이 아이들과 그를 끝없이 이간질시켰다. 어떤 개인도 그것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 혼자 길을 떠났다.




길 떠난 첫날


세상의 수많은 소설 중에 이 책이 내게로 와 떠나지 않는다.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잇고 있다. 일터에는 지난 15년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와 메워야 할 시간이 있었다. 항상 그 자리, 그 시간에 있어야 한다고 나를 옥죄어 왔다. 휴가를 낸 오늘 하루, 나는 그 옥죈 손을 풀었다.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소설 '소금'의 이야기를 따라 충청남도 어디에 남아 있다는 염전을 향해 차를 몬다. 나 혼자다. 물, 커피, 샌드위치, 책, 노트, 카메라. 펜 따위가 조수석에 있다. 나의 보고된 실종은 그렇게 시작된다.

어떤 염전

소설 속 염전이 어딘지도 모른 채 어떤 염전에 도착한다. 바닷물이 고인 염전 앞에서 눈을 감고 주인공 '선명우'의 아버지 '선기철'을 생각한다. 그는 염전에서 일하다 몸에 소금이 다 빠져나가 소금더미 속에 고꾸라져 죽는다. 염전에 소금은 없다. 아직 소금이 올 때가 아니다. 염부들은 소금이 생기는 것을 '소금이 온다'라고 한다.


선명우는 토판염에 집착하지만 현실의 염전 바닥은 온통 타일로 덮여 있다. 사진 속 멋진 여행지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 가보면 그냥 사람 사는 마을인 경우가 있다. 나도 소설과 현실의 괴리 가운데 서있다. 이 의미 없는 상황이 좋다.


어젯밤까지도 여의도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의미 없는 상황에 몸을 맡긴 나는 모든 것이 어색하다. '서천 죽산리 염전'은 내비게이션에 없다. 결국 출판사인 한겨레에 전화를 한다. 친절하게 문자로 현재의 지명을 알려 준다. '서천읍 마서면 죽산리'는 마지막 날 찾아가 보기로 한다.


숙소로 잡은 대천으로 가는 길에 '안면도 자연휴양림'이 있다. 바지락봉, 새조개봉 등 갯내음 나는 봉우리들을 돌며 수목원을 즐긴다. 제초작업이 한창이다. 시골에 벌초하러 가면 맡을 수 있는 풀의 피 냄새. 알싸한 그 냄새 아래 무수히 쓰러진 풀의 시체들. 인간은 자기 눈에 거슬리면 파괴해 버린다. 뿔을 바로 잡으려고 소를 죽이듯.

대천 숙소에 들어와 일회용 음식들로 진수성찬을 차린다. 배가 부르니 잠이 온다. 편안한 침구를 깔고 눕자 모든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난 왜 이 여행을 떠났나? 사실 난 좀 지쳤다. 술에, 담배에, 사람에, 일에, 돈에. 나도 한 때 ‘이 악물고’ 사는 비장함을 즐겼다. 그러나, 이미 비장함이 찌질함인 시대가 왔다.


길 떠난 둘째 날


대천해수욕장에 나선다. 본격 휴가철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없다. 사진도 찍고, 백사장에 앉아 바다도 보니 끓던 분노가 사라지고 평화가 온다. 돌아와 손빨래로 땀에 젖은 옷을 빤다. 난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할 줄 안다.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신 이후로 나에게 집안일을 가르치고 맡겼다.


연탄불 붙이고, 형광등 갈고, 그런 것들만 잘해도 훌륭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며 자랐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다. 평범한 삶이 목표였다. 그러나, 평범하게 사는 그 평범한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에 새기며 살게 된다.


대천항에서 낚시를 한다. 물은 기름이 끼고 쓰레기가 떠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숭어를 끌어올린다. 사람들은 탐욕스럽다. 필요 이상으로 다른 생명을 파괴한다.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맘대로 부서뜨리고, 망치고 남이 해결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딱 그렇다.


길 떠난 마지막 날


SNS에 박범신 소설가의 답장이 왔다. 어제 소설 속 염전과 빈집에 대한 질문을 올렸다. 서천 죽산리 염전은 이제 없고, 옥녀봉에 빈집은 아직 있단다. 출판사는 친절했지만 염전이 없어졌다는 것은 몰랐나 보다. 찾아간 그곳엔 양식장이 있다. 염전은 선명우가 그리도 싫어한 ‘생산성’을 추구하는 양식장이 된다.

선명우의 고향을 묘사하며 나왔던 '장항항'에 왔다. 묘사대로 왼쪽으로 장항제련소 굴뚝과 건너편의 군산항이 보인다. 이제 선명우가 '세희'를 만나던 강경으로 간다. 기구한 사연으로 논 사이 개천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는 선명우의 까까머리가 보이는 듯하다. 배를 타던 황산나루에는 황산대교라는 다리가 놓였다. 다리를 건너니 강경이다.


소설 속 세희가 살던 '젓갈 상회', 세희가 다니던 '강경여고'(지금은 강경고)를 들러 '옥녀봉'에 오른다. 소설가의 설명대로 따라가니 옥녀봉 북동쪽에 정말 빈집이 있다. 강경과 논산 사이의 너른 들판을 보고, 선명우가 끼고 걸었던 '탑정호수'를 돌아, 고모댁이 있던 '산노리'로 간다. 거기서 여행이 끝난다.


다시...


선명우, 선기철, 혜란, 세희, 김승민, 함열댁과 지난 사흘을 함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희망하는 일들은 참 느리게 오고, 원치 않는 일들은 참 느닷없이 온다. 마치 소금이 오듯 느리게, 또 느닷없이. 그런 인생일 것이다. 그래도 다시 살 힘이 생긴다. 다시 이를 악문다.


빈집 근황.참 친절한 대한민국이다.^^
2024년 3월 2일, 다시 찾은 빈집. 자본주의가 비어있음의 가치를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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