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음의 말이 도전과 노력을 부추기는 최고의 명언이라 생각하며 가슴에 새겨왔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은 배가 만들어진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배는 큰 바다로 나가는 순간 위험에 직면한다. 끝내 돌아오지 못 한 배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항구를 떠난 모든 배가 항해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영화배우의 졸업식 연설이 인터넷에서 인기다. 그는 우리가 겪는 실패가 용감한 도전의 반증이라고 말한다. 실패를 통해 진정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남다른 뭔가가 없다면 실패는 정말 두려운 것이다. 그는 넘어져보라고 말하지만 그러다 다시는 못 일어날 수도 있다.
유명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 앞에서 하는 그런 말들은 분명 영감과 희망을 준다. 그런 반면 그 안에서 개인의 인생은 계량화된 표본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성공의 척도에 따라 객관적으로 점수가 매겨진 인생들이 어떤 형태의 분포를 만든다. 인생에 그런 계량적 차이가 존재해야 도전, 성공, 실패 등의 말들이 더 강렬해지는 것 같다.
밥벌이를 시작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계량화되었다. 그 전에는 인생이 꽤나 독립적이었고 계량화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술 많이 마셔, 기타 잘 쳐, 돈 너무 안 내, 농담 잘해, 인간성 괜찮아' 따위의 점수를 매기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들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논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이제 그런 것들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계량화된 인생은 양면성을 가진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남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좌절감에 빠지기 쉽다. 또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두 부류의 대비가 더 극렬하게 요구되는 세상에서는 성공의 척도가 단순하고 명료할수록 좋다.
직장에 근무하면서 긴 시간이 흘렀다. 매달 월급을 받았으니 그 횟수도 어마어마하다. 가정을 일구어 자식들을 키우고 부모도 공양했다. 직장이라는 곳도 개별 인생들이 모인 표본집단이라 비계량의 평가들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모집단으로 돌아온 인생은 결국 큰 흐름의 계량화를 피해 갈 수 없다.
객관적으로 계량화된 인생은 나다울 수 없다. 성공한 인생은, 말하자면 그들다운 인생인 것이다. 단순 명료한 예를 들자면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을 쫓아가는 것이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최선을 다해 남들답게 하는 것이 된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일과 인생을 동일시해왔고 '워크 라이프 밸런스'라는 말이 나왔을 때 솔직히 좀 어색했다. 일에 소비된 시간이 가정에 소비된 시간보다 월등히 더 많았다. 이런 사실 자체가 비웃음거리가 되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왔어도 그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제 나는 바뀐 시대에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가? 그것이 이제 나를 나답게 해 줄 수 있는가? 내 결론은 '아니오.'다. 나는 계속 일과 인생을 동일시하며 살고자 한다.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나를 일에 갈아 넣겠다.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도 어쩔 수 없다. 살기위해 가야하는 길이다. 혹 그것이 계량적 성공에 도달하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부지리지 목적이 아니다.
나름의 역경을 이겨내 온 내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이것은 비계량적 찬사다. 지금 계량적인 점수가 다소 모자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나다운 것을 택하려고 한다. 그들다움을 쫓지는 않겠다. 나는 부족함을 폭탄처럼 끌어안고 육탄으로 돌격할 때 가장 나답다. 모든 사람이 다 완벽한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
나는 한 마리 새다. 하늘이 내 세상이고 나는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날 때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나에게도 중력이라는 적이 있다. 중력을 이겨야 날 수 있다. 중력에 지면 추락한다. 중력과 싸우려고 처절한 날갯짓을 한다. 날갯짓은 내 숙명이다. 처절한 날갯짓이 나를 나답게 해 준다.그리고 파닥거린 모든 인생은 존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