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하는 하루
생(生)이란 것이 ‘0, 1’의 사실판단에서 ‘1…’ 이상의 가치판단으로 변한 지 오래다. 어찌 됐든 지금도 끄트머리엔 0으로 떨어지겠지만, 최대한 숫자를 늘리면 0까지 떨어지는 기간도 길어지는 것 같다. 덤으로 그 크기만큼 일신의 즐거움도 따르고 말이다.
지금 나는 ‘1’ 정도로 살고 있다. 대차게 차고 나가는 추진력도, 특별한 호사스러움이나, 끔찍한 빈곤도 없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중첩지. 이곳에서 지구와 함께 자전하는 기분이다. 묵묵히 눈을 뜨고 있으면 밤과 낮이 지나간다.
이는 태초부터 생긴 전지구적 기초 사이클이다. 문명화된 오늘도 이를 놓고 생활 단위를 나눈다. 그런데 이것이 지구의 중력에서 벗어나면 달라진다. 회전하는 것은 그저 지구일 뿐, 함께 돌지 않는다. 그곳에서 충분한 각운동을 할 수 있다면 달과 같이 자신의 사이클이 생긴다. 이는 지구의 객체화다. 가만히 있어도 함께 움직이던 전 생명체와 분리된 것이다.
<그래비티>는 이것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절대적 타자화. 마지막 우주비행 임무를 맡은 맷은 이를 고요라고 표현한다.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존재할 자유. 그 때문인지 그는 유일한 지구와 연결고리인 안전걸쇠를 기체에 걸지 않는다. 제트분사기를 타고 우주유영을 한다. 저 정복되지 않은 검은 아가리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말이다.
반면, 과거 지구에서 자식을 잃은 라이언은 무참히 뜯긴 삶을 채울 목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맹목적인 움직임은 그녀를 우주까지 보냈다. 그녀를 지탱하는 건 역할이란 관성이다. 파괴된 인공위성의 파편이 총알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순간에도, 그녀는 허블망원경을 고치는 NASA의 임무를 놓을 수가 없다.
잇따른 처참한 충돌. 매질이 희박한 우주는 위성이 처참히 파괴될 때에도, 인간이 관통 당해 죽을 때에도 어떤 소리도 전달하지 않는다. 침묵의 기병대에 라이언 또한 기체와 함께 우주공간으로 던져진다. 뒤늦게 자신을 묶은 기체와의 연결을 풀지만 그녀를 붙잡을 중력도, 언젠가 멈춰줄 마찰도 없다.
이때 감독은 지구와 라이언의 객체 관계를 말없이 카메라로 보여준다. 라이언 시점에선 지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반복과 함께 점차 작아지고, 자신의 비명과 호흡이 쉴 새 없이 들리지만. 라이언에게서 카메라를 떼자 평온한 우주에서 회전하며 날아가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대안으로 붙잡은 생의 맹목적 수단이 그녀를 궤도 밖으로 내던졌을 때, 다시 그녀를 잡아 견인한 것은 ‘아무렴 어때’ 맷이었다. 서로 맨몸으로 우주에 던져진 위기에서도 그녀의 지난 얘기나 듣길 바라는 사람. 얼핏 보면 한량 같은 맷은 삶의 목적이 삶이라는 우로보로스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분명 러시아 ISS의 소유즈 통해 탈출한다는 계획이 실패한다면 둘 다 가장 넓은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다. 유일한 이동수단 제트분사기의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언은 미량의 잔존 산소와 조난 경험으로, 패닉에 빠져 견인줄을 두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 걸 알면서도 맷은 유영하며 지나가는 우주의 풍광이 아쉽다. 고개를 돌려 갠지스강에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지구의 낮과 밤을 보며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한다.
우리의 시선도 여기서 라이언과 맷을 옮겨 다닐 수 있다. 라이언을 따라가면 절명의 순간 진지하지 않은 맷, 1인칭으로 보이는 줄을 쥔 손, 계속되는 산소량 경고음에 숨 막히지만. 맷이 아쉬워하며 둘러보는 그곳의 배경은 천천히 구르는 푸른 구체와 별빛처럼 어둠을 밝히는 도시, 대양에는 소용돌이치는 대기와 반구를 서서히 빠져나와 빛을 뿜는 태양이 있다.
다행히 능청스런 맷과 함께 ISS에 도착했지만 역시 계획대로 될 수는 없었다. 겁에 질려 어설프게 구는 라이언과 서로 부딪히며 기체를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상황이 생긴다. 그리고 언제나 시덥잖은 맷이 아쉬움 없이 끈을 놓는다. 타이타닉에서 로즈를 구하고 조용히 심연으로 떨어지는 잭과 달리, 맷은 라이언을 구한 뒤 심연으로 가면서도 제 눈을 보며 반했는지 묻는다.
“만개한 꽃을 바라보기에 / 50번의 봄도 넉넉하지 않다.”1)는 하우스먼의 구절은 이러한 맷의 선택을 잘 설명해 준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아쉽고, 어제든 오늘이든 아름답다. 라이언에게 나타난 절대적 타자는 명징한 개인의 외로움과 두려움이었지만, 밖에서 고요히 유영하던 맷에게는 영원히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유할 수 없는 미인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은 희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삶의 중력을 조금 회복한다. 맷이 남긴 탈출 계획을 필사적으로 이행한다. ISS에서 산소를 재보급하고, 중국의 우주정거장 톈궁으로 구조신호를 보낸다. 화재와 파편을 피하며, 남겨진 소유즈와 엉킨 낙하산 줄을 끊는다. 그리고 수차례의 조정으로 톈궁을 향해 기체를 정렬한다. 마지막 발사 버튼을 누르지만 불행하게도 남은 연료는 없었다.
이젠 맷도 없는 완벽한 고립이다. 눈앞에 지구가 있음에도 돌아갈 수 없는 외로움. 다시 90분을 돌아 파편이 오면 지금의 소유즈도 산산조각 날 것이다. 우연히 잡힌 지구의 전파. 수차례 구조 요청하지만 대화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의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달래는 노랫소리는 라이언은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산소배출구를 열고, 눈을 감는다. 그나마 미약한 연결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 라이언의 두 번째 죽음은 의무, 책임, 죽음의 공포에서 모두 좌초된 채 모든 에너지를 잃고 부유하며 찾아온다.
꿈처럼 다가오는 저산소증에 빠질 때, 소유즈의 외벽을 겨우 붙잡은 맷이 창을 두드린다. 음침한 파티라도 하냐며 소유즈에 들어와 산소배출구를 닫는다. 주머니에 여분 배터리가 있었다며 웃곤 자세한 건 지구의 술집에서 얘기해주겠다고 말한다. 시스템을 켜고 출발 준비를 하는 맷. 하지만 라이언은 연료가 없어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계기판을 보던 맷은 말한다.
“착륙은 출발하고 같아 라이언.”
맷이 가리킨 것은 최종 지구 복귀 시, 지상 5M 지점에서 연착륙을 위해 귀환모듈에서 발사하는 역추진 장치였다. 단 한 번의 수직 분사. 지금 라이언이 조정해 놓은 방향으로 발사해 톈궁을 스칠 때 옮겨 탄다는 계획이다.
“불가능해요. 시뮬레이션에서 내가 한 소유즈 운행은 성공한 적이 없어요.”
“그러라고 있는 게 시뮬레이션이지.”
라이언이 완강하자, 맷은 시스템을 하나씩 끈다. 점차 어두워지는 조종실. 산소 경고음도 다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죽나, 실패해서 죽나 똑같지 않나? 그래도 만에 하나 성공하면 평생 술집에서 할 얘기가 있을 텐데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라이언은 깬다. 저산소증으로 보인 맷일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같지 않냐는 맷의 말. 처음으로 라이언은 딸의 죽음으로 맡은 역할도 아니며, 본능의 공포가 던진 의지도 아니며, 맷의 희생으로 가진 책임도 아닌, 그저 귀환을 위한 출발을 감행한다.
불타 죽거나, 돌아가서 술집에서 얘기하거나.
이제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돌파하는 라이언. 소화기를 제트분사기 삼아 톈궁의 소유즈로 갈아타고 지구를 향해 출발한다. 대기권을 무사히 돌파하고도 호수에 착륙해 귀환모듈이 침몰하는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물속에서 깨어나는 탄생의 은유일 것이다. 함께하던 동일성의 세상에서 튕겨 난 뒤, 방향을 잃고 부유하던 존재가 점차 자신의 질량과 방향을 갖고 궤도를 따라 유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한껏 로우로 담긴, 대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지구에서 떠난 인간이 아닌, 우주에서 여행 온 즐거운 이방인임을 알려준다.
이제 다시 라이언과 같은 땅에 서서 낮을 바라본다. 라이언이 느낄 삶의 ‘0’과 ‘1’을 상상한다.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중력권에서 서서히 궤적을 그려낼 것이다. ‘0’에 멀어지지도 다가가지도 않고 제 위치에서 유영하며, 태양과 지구와 같이 삶을 품어낼 것이다. 분명 그런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언제나 계절이 흐르고, 매일 아침이면 갠지스강의 일출이 떠오를 것이다.
1) A. E. Housman, 「Loveliest of Trees, the Cherry Now」(1896), “And since to look at things in bloom / Fifty springs are little 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