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그래 그건 쉽게 말해 통조림이다. 그것도 꾹꾹 눌러 담은.
결국 반복되면 우린 무감각해진다. 고통도 괴로움도. 그 결과가 바닥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 바닥과 눈 사이엔 작은 세상이 놓여있다. 바닥조차 볼 수 없다. 현실이 너무 괴로운 것일까? 한순간도 그들은 현재를 보려 하지 않는다.
주말엔 네버랜드. 평일엔 디스토피아.
언젠가 TV에서 불법으로 밀사 사육된 동물들을 본 적이 있다. 살과 살 사이 파묻힌 동물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참 이상했다. 짓눌리게 되면 발버둥을 칠 줄 알았다. 괴로우면 날뛸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짐승들이 난동을 피워 광란의 카니발이 펼쳐질 줄 알았다. 저 동물들이 온순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의 꼬리를 끊었다.
인간 통조림 속에서 난 알았다. 파묻힌 곳에서는 어떠한 의지도 없이 가만히 있게 된다는 것을. 손에 잡힌 잠자리처럼 딱 멈춰버리는 것이다. 신선하지 않으니 잡아먹지 말라는 것일까? 나보다 오래된 DNA 속 파묻히고 파묻힌 그 전략이 나타나는 것일까? 나도 거인의 손에 잡힌 잠자리 마냥. 딱 멈췄다. 등과 등과 등 사이에서 끼인 채로 제발 먹지말아달라는 듯 멈췄다. 그렇게 이동-
하나의 스크럼일지도 모른다. 가지도 없는 콘크리트 줄기에 매달렸다, 떨어졌다, 다시 매달려야 하는 이파리들이 뭉쳐 견디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쌓인 낙엽들도 밀고뭉쳐 화내고 의지하고 할까.
통조림 캔이 따진다. 이제 질릴대로 질린 사람들은 미닫이 문을 당기면 따라 나오는 바람처럼 돌진한다. 얼결에 내릴 필요 없는 승객은 초원 누 떼 사이의 자동차가 된다. 급류의 강물 중앙에 놓이게 된다. 할 일은 바위처럼 버틸 뿐. 오랫동안 지내면 이끼라도 끼면 좋겠다. 그럼 마를 때면 폭신하고, 젖을 때면 스르륵 미끌릴텐데. 내 차례다 나도 미끄러져 나간다. 흐름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움직거리면 어쨌든 공간은 난다. 그때 누가 괴로이 눌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제 통조림 콩은 거대한 애벌레가 된다. 단단한 지층을 뚫어 올리는 애벌레. 꿈틀거리는 힘찬 허리가 계단에서 한껏 굽혔다 차고 오른다.
본디 모두 하늘을 보고 흙을 디뎌 시작한 집단일텐데, 이제 생산은 땅속까지 펼쳐졌다. 애벌레는 힘차게 돌바닥도 훑고, 콘크리트 나무도 매달려 버틴다. 어떤 모습이 나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도 버틸 뿐이다. 언제쯤 입에서, 엉덩이에서 실이 나오는지 모른다. 정작 함께하니 그들이 나비의 환상에 속았다는 생각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고민할 시간이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도시가 너무도 작아서, 손바닥의 세상이 넓은 걸수도 있다. 괴로워서 눈을 감은 것일 수도 있다. 눈을 뜰 수 없어 잠들었구나. 아 통조림은 상하지 않아서 어떡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