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서울에서 ‘달고나’라는 어휘를 처음 들었을 때 참 생소했던 기억이 있다. ‘달고나’의 실체를 알고 난 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단어는 “아! 떼기!!”였다. 내가 나고 자란 지방에서는 설탕과 베이킹소다를 녹여서 납작하게 누르고 틀로 찍어낸 간식을 ‘떼기’라고 불렀다. 이처럼 같은 대상이어도 시공간에 따라 달리 지칭되는 어휘들이 있다. ‘뽑기’, ‘띠기’, ‘떼기’, ‘쪽자’, ‘국자’, ‘야바구’, ‘똥과자’, ‘오리떼기’...... 지역마다 달고나를 지칭하는 이름들이다. 특정 지역에서 생활하거나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익숙한 어휘가 입에 배어 있다.
어휘는 이 같은 ‘지역색’ 뿐만 아니라 계급, 연령, 직업, 성별 등 사회적 ‘집단색’을 띄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명하복 서열 문화 기반의 군대에서 군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10대 청소년들이 또래 집단에서 사용하는 언어, 영어 전문용어로 가득한 의사들의 언어, 이른바 ‘보그체’가 일상화된 패션업계 종사자들의 언어들은 각각 결이 확연히 다르다. 집단 내에서 구성원들끼리 소통하는 전형적 어휘나 표현방식이 굳어져 있어 ‘그들만의 리그’ 색채가 선명하다.
이처럼 어휘에는 사용자의 배경이나 신분, 특징, 감정, 정서 등이 묻어난다. 번역가들은 해당 어휘가 어떤 취지로 선택되었는지, 어휘에 어떤 이면 정보들이 실려 있는지 뒤살펴야 한다. 원형 그대로의 느낌을 고스란히 옮겨서 발화 상황과 잘 어우러지도록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관련 콘텐츠의 중국어 번역을 감수한 적이 있었다. 내용 중에 피해자 할머니의 구술 증언 영상도 있었는데, 사자성어가 곳곳에 섞여든 유창한 문어체 번역이 한과 화를 억누르며 힘겹게 내뱉는 할머니의 말투와 잘 겹쳐지지 않았다. 번역이 너무 유려한 것이 문제였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수모를 겪었던 고령의 할머니들이 아픈 기억을 들춰내며 털어놓는 증언에는 실제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도 많았고, 앞서 했던 말이 두서없이 중복되기도 하고, 토속적이고 예스런 표현들도 종종 등장한다. 흥분해서 감정이 격해지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감정에 북받쳐 중간중간 말을 흐리거나 끊겨서 침묵이 유지되는 구간도 있었다. 당시 나는 번역자에게 입말 증언 특성 상 현란하고 고급스런 화술을 구사하기 보다는 듬성듬성하고 투박하더라도 피해자의 언어 특징과 발화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충실히 재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던 기억이 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번역자에 의해 빈틈없이 매끄럽게 빗질된 언어가 아닌 피해자의 육성 언어 그대로를 느끼고 싶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 과정을 거치며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더욱 실제에 가깝게 재현되어 작품이 훨씬 다채로워진 사례도 있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영문 소설 『파친코』가 그렇다.
영어로 창작되었지만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1980년대까지 격동의 세월을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작품은 한국어로 번역됨은 물론 애플TV의 투자를 받아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전문 번역가들에 의해 한국어로 옮겨지면서 영어 소설 내에서 영어 표준어로 평이하게 구사되었던 대화체들이 각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특징, 지역색이 실감나게 입혀졌다. 영어, 한국어, 일어, 부산 방언, 제주 방언, 전라도 방언, 재일동포 자이니치 한국어 등 실제 지역성을 드러내는 언어로 복원되었다. 밋밋했던 대화들이 본디 인물에 어울리는 원색을 되찾으며 훨씬 입체적이고 맛깔스러워졌다.
사실 번역에서 방언의 재현은 어렵고도 까다로운 작업이다. 중국의 쓰촨 지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한국어로 옮긴다고 해서 밑도 끝도 없이 쓰촨 방언을 한국어 특정 지역 방언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친코』는 다소 특수한 사례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영어로 쓰였지만 엄연히 한국의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특정 지역 출신의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다채로운 방언의 분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의미 전달이 목적인 단순 의사소통을 제외하고 일단 번역가는 지역색이 드러나는 어휘든 집단색이 드러나는 어휘든 가능한 색을 빼지 않고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군인은 군인답게, 법조인은 법조인답게 해당 직업의 전형적 화법으로 옮기고, 연령이나 성별, 계층에 따른 말투 차이도 최대한 선명하게 반영해야 한다. 다만 문학작품이나 영상 콘텐츠에 등장하는 지역 방언의 경우 시대적 배경이나 전체 환경, 공간과의 조화도 고려해야 하므로 번역 과정에서 지역색이 불가피하게 희석될 때가 많다. 번역가가 그때그때 상황과 맥락을 판단해 처리해야겠지만 대개 표준어로 대체하거나 그 인물의 다른 사회방언적 요소들을 부각시켜 상쇄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처럼 개개인의 언어 특색을 타언어로 구현하려면 지역별, 직업별, 연령별, 계층별, 성별 화법 경향과 어휘 특징들을 섬세하게 터득하고 유연하게 운용할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