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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Apr 26. 2024

#1-3. 어휘에도 단짝이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어휘에도 자주 어울리는 짝꿍 혹은 무리가 있다. 쿵하면 짝하는 찰떡 호흡의 단어들은 ‘1+1 세트’로 묶어 알아두어야 한다. 언어학에서는 소위 ‘공기(共起, 동시 출현)’ 관계에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단짝 어휘들은 번역을 할 때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이다.     



첫 번째는 명제적 개념에 따라 조합 가능한 어휘가 제한적인 경우다. 

몸에 착용하는 사물이라도 종류에 따라 옷은 ‘입는다’라고 하고, 신발이나 양말은 ‘신는다’라고 하며 모자는 ‘쓴다’, 넥타이는 ‘맨다’고 한다. 

또한 ‘정박하다’는 ‘닻을 내리고 머무르다’는 의미로 ‘배’에만 쓰이며, ‘출항하다’는 ‘배나 비행기가 출발한다’는 의미로 한정되어 ‘기차’나 ‘버스’ 등에는 쓰이지 않는다. 그러니 번역을 할 때도 대상 어휘에 따라붙는 서술어들을 잘 선별해서 써야 한다.      


가령 ‘뚫다’, ‘뚫고 지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중국어 동사 ‘穿(chuān)’과 ‘올라가 몸을 싣다’, ‘올라가 이용하다’라는 의미의 한국어 동사 ‘타다’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 동사는 뒤에 어떤 사물이 오느냐에 따라 번역이 유연하게 달라져야 한다.                    




다음으로는 관습적으로 굳어져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경우다. 소위 ‘연어’, ‘관용어’라고 부르는 어휘 요소들이다. 이미 고정되어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들은 하나의 의미 덩어리로 늘 붙어다니기 때문에 임의로 바꿀 수 없다. 


한국어에서 ‘손이 크다’, ‘발이 넓다’는 단순히 물리적 크기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씀씀이가 후하다’, ‘인맥 또는 활동 범위가 넓다’는 의미의 관용어로도 활용된다. 이는 ‘손이 넓다’나 ‘발이 크다’와 같이 짝바꾸기 시도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묶여 있다. 억지로 풀어헤치면 존재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 조합 자체의 관용적 의미를 숙지해 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번역을 할 때도 표피적 의미에서 겉돌지 않고 정확한 의미의 속살을 꿰뚫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태우다’라는 표현이 나왔다면 이동수단으로서 실제 비행기를 타게 하는 상황인지,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높이 추어올리는 것을 비유하는 상황인지 파악해야 한다. 후자라면 중국어로 옮겨야 하는 경우 또 한번의 판단을 거쳐야 한다. ‘비행기 태우다’를 그대로 옮기면 칭찬으로 상대방을 띄운다는 본래 의미가 전혀 전달될 수 없다. 따라서 ‘戴高帽子(고깔모자처럼 높은 모자를 씌운다)’와 같이 중국에서 동일한 상황에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같은 관용어는 공식처럼 굳어진 조합 형태가 있기 마련이라 번역가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어휘를 뽑아내 적재적소에 끼워맞출 줄 알아야 한다. 출발어와 도착어의 언어 관습을 숙지하는 한편 특정 어휘 앞뒤로 자주 등장하거나 븥어다니는 단짝어휘들까지 예측하고 장악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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