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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꺅뿡 Mar 22. 2020

#2. 추억이 깃든 나의 하버드

엄마와 학생, 그리고 딸




엄마의 박사 졸업 논문을 남겨두었을 때, 나는 태어났다. 첫 돌 이후 엄마는 복학을 결심했고 선택권이 없던 그 시절의 나 또한 보스턴으로 갔다. 4살 정도까지 보스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 할리는 만무하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몇 가지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있다.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다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정말 소중하다. 이런 경험의 환경을 선사해준 부모님께 참 감사하다. 분명 이렇게 감사할 점들이 많이 있는데 왜 나는 남들과 비교하며, 부모님과 비교하며, 감사보다 불만과 핑계를 찾기 바빴던가.






보스턴 감성 사진


1. 덜컹이 곰돌이과자

엄마랑 보스턴을 간다면 제일 먼저 하버드 교육대학원 컴퓨터실을 가고 싶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 아니기에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도 나는 그곳의 풍경을 기억한다.


엄마의 전공은 교육학이었다. 교육대학원답게 그곳에는 시판되는 학습용 소프트웨어부터 학생들이 개발 중인 학습용 게임이 많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일지라도 화면 속에 많은 캐릭터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몇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하지만 내가 그 교육용 만화들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덜컹이 곰돌이과자'였다. 컴퓨터실 앞 복도에 있던 스낵 밴딩머신을 '덜컹이'라고 불렀다. 그 밴딩머신의 teddy grahams를 꼭 먹었다. 최근에 시카고에 가서 teddy grahams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먹었는데 그냥 평범한, 삼삼한 맛의 크래커였다. 역시 추억의 맛은 추억으로.


2. 유아원과 bathroom

    "엄마, 나 화장실이 영어로 뭔지 안다. 베쓰룸!"

    "어려운 영어인데? 어떻게 알았어?"

    "어떤 친구가 선생님한테 베쓰룸이라고 말해서 어디 가나 봤더니 화장실에 갔어."

    "와. 오늘 벌써 하나 배웠네. 내일도 또 다른 것 배우겠다."


4살 무렵 나는 미국 유아원을 다녔다, 무려 하루나. 그 하루 동안 bathroom이라는 단어를 눈치껏 알아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유아원에 가지 않았다.


4살이면 언어 습득력이 굉장히 높을 나이고, 또한 언어가 달라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는 나이다. 당시 엄마는 내가 미국 유아원을 다니며 자연스럽게 '진짜' 영어를 경험하기 바라셨던 것 같다. 언어 하나만을 위해서 조기유학도 가는 세상인데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좋은 기회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나는 낯선 환경, 낯선 언어, 낯선 친구들이 너무 싫었다. 아니, 아마 무서웠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난다, 마치 외계인들 사이에 혼자 떨어진 지구인이 된 기분이었다. 모두가 외계어를 말하고 하하호호 웃을 때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최대한 읽으며 상황 파악을 하고자 노력했다. 놀이터에서 노는 시간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는데 가고 싶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따라다니는 것이 들키면 나한테 말을 걸 것 같아서 몰래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베쓰룸'이라고 했고 선생님이 화장실로 그 친구를 데려갔다. 그때 나는 베쓰룸이 화장실이란 것을 알았다. 생존 영어.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으며 힘들게 알아낸 단어여서 너무 뿌듯했고 그날 저녁 엄마한테 자랑했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그 외계인 무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렸고, 교육철학에 '억지로'가 없으셨던 엄마는 나를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좋은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때 유아원에 계속 다녔으면 지금 내 발음이 네이티브 같았을까?


음... 아니.

지난 과거에 후회하지 말자.


3. 엄마가 박사가 될 수 있었던 숨은 이유

엄마의 모든 박사 과정이 끝나고 보스턴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방문했다. 나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이 당시 업무의 전부였지만 엄마는 '엄마'와 '학생'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느라 분명 힘드셨을 터. 그 '학생'의 과정이 끝나면서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그때 엄마가 나한테 말했다.


    "한별아, 네가 잘 도와주어서 엄마가 공부를 마칠 수 있었어. 고마워."

    "응. 엄마."


뭐가 그리 당연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너무 당연하게 그 감사인사를 받아들였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학생을 보고 한마디 더 했다.


    "저 아저씨는 나 같은 딸이 없어서 아직 공부가 안 끝났지?"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했고, 나는 오글거리는 것이 싫어서 그냥 그 감사인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가 나한테 고마워할 이유가 있나 싶다. 박사 학위까지 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게다가 논문을 second language로 써야 했고, 거기에 딸을 키우는 엄마의 역할도 해야 했다. 나는 절대 못할 것 같다. 엄마는 참으로 대단한 여성이었다. 그 박사 학위는 순전히 엄마의 노력과 열심으로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나 정도면 엄마로서 자녀교육도 fail은 아니지 않나? 부모한테 자식의 존재란 어떤 의미일까? 나한테 고맙다고 말해준 엄마가 새삼 고맙다.






언젠가 엄마가 내 글을 읽게 되면 교육학을 공부하셨던 것을 이렇게 써놨다고 뭐라고 하실 것 같다. 워낙 탱탱볼 같은 나 덕분에(?) 교육학 전공자의 자녀교육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고. 하지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다양한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는 것, 전공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30년 동안 분명 알게 모르게 나는 성장했고 엄마도 성장했고 그렇게 우리 모녀는 성장했다.


(그리고 솔직히 나 정도면 꽤 무탈하게 자랐다고 생각한다. 범법행위를 저지른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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