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위키드> - 엘파바의 이야기
각자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오즈에 사는 마법사를 찾아가는 도로시와 친구들의 이야기 <오즈의 마법사>, 그들은 어쩌다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가 됐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작품이 뮤지컬 <위키드>(대본, 가사: 위니 홀츠만/ 작곡: 스티븐 슈왈츠)다. 이 쇼는 ‘오즈의 마녀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사악한 서쪽 마녀와 착한 북쪽 마녀가 주인공이다. 내 맘대로 인물분석 두 번째 관찰대상은 그중 서쪽 마녀의 이야기다.
먼치킨랜드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주지사의 첫째 아이라 세상은 기대 속에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기다리는데, 태어난 아이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주지사 부부: 왜 아기 피부색이 개구리 같지? 왜 양배추처럼 초록색이야? 아, 흉측해!
주지사: 당장 치워! 치워 버리라구!
하지만 겉모습만 다를 뿐, 아이는 지극히 평범하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고, 자신과 다르게 미녀로 태어난 여동생 네사로즈 때문에 더 가혹한 괴물취급을 감당해야 하지만 연약한 동생을 돌봐주는 심성 고운 언니다. 자신에게 해괴한 마법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땐, 세상의 더 큰 미움을 살까 봐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간다. 이 아이가 ‘사악한 서쪽 마녀’로 우리에게 알려진 엘파바다. 그녀의 이름에 대해 잠시 소개하자면, 뮤지컬의 원작인 동명소설을 쓴 그레고리 멕과이어가 <오즈의 마법사>의 작가 엘 프랭크 바움(L. Frank Baum)의 이니셜 L, F, B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식 날, 엘파바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수치스럽게 여겨온 자신의 마법 능력이 모두 갖고 싶어 하는 재능이라는 것.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숭배하는 오즈의 마법사와 쉬즈 대학의 모러블 총장이 오랫동안 자기 같은 학생을 기다려왔다니! 태어나 처음 그녀는 꿈을 꾼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는 순간,
내 인생이 바뀔 거야.
(중략)
그리고 어느 날, 그분이 말하겠지.
“엘파바, 너 같은 마법 천재한테 지금의 외모는 어울리지 않아.
이곳 사람들이 네 피부색을 이상하게 여기니,
내가 네 피부에서 초록색을 없애주면 어떨까?”
그리고 이 날,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게 될 한 사람, 글린다를 만난다. 기피대상 1호인 엘파바와 달리 글린다는 인기 만점 금발미녀다. 룸메이트가 된 두 사람은 처음엔 서로를 극혐 하지만, 엘파바의 도움으로 글린다가 자격미달임에도 불구하고 모러블 총장의 마법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절친이 된다. 이 둘 사이에 훈남 피에로가 등장하며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놓인다.
우리는 엘파바를 ‘사악한’ 서쪽 마녀, 글린다를 ‘착한’ 북쪽 마녀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글린다가 질투에 눈이 멀어 마법 천재였던 엘파바를, 자의든 타의든 우연이든 사고든, 마녀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 둘을 여전히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골탕 먹이려고, 보기 싫은 검은 마녀모자를 예쁘다며 그녀에게 처음 씌운 게 글린다라는 걸 안대도? 오즈의 마법사와 모러블 총장이 엘파바에게 잘 해준 이유가 그녀의 마법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정복하려는 계략 때문이었다. 엘파바가 자신의 힘을 나쁜 데 쓰지 않겠다며 도주해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 일당은 엘파바를 사악한 마녀로 몰며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글린다의 인기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려 할 때, 모든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의 환호성에 취해 작당모의에 합류한 그녀를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 가증스러운 건, 그럼에도 끝까지 엘파바의 도움을 받고, 끝까지 좋은 친구의 가면을 벗지 않는다. 대략 십 년 전 극장에서 <위키드>를 보며, 그닥 감동을 받지 못했던 건, 납득이 가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략 십 년 후 대본으로 다시 공연을 접하며, 나이가 들며 내가 달라진 탓일까? 엘파바가 ‘사악한’ 서쪽 마녀가 된 건, 자기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존감의 있고 없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든 엘파바가 자신만의 특별한 두 가지, 초록 피부와 마법 능력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다면, 그녀야말로 인기 만점 착한 초록마녀가 됐을지도 모른다. 오즈의 마법사와 모러블에게 이용당하거나 괴롭힘 당하는 대신, 당당하게 그들을 해치우고 오즈나라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글린다는 예쁜 외모가 장착시켜준 하늘 찌를 듯이 높은 자존감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 덕분에 마법 능력이 없는데도 마녀가 되고, 자신을 믿는 친구를 위험에 빠트리고도 착한 마녀로 오래도록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엘파바와 비교하며 자신은 예쁘기만 하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자학했다면 둘의 인생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 속 주인공으로서의 엘파바는 매력적이지 않다. 자신을 혐오하고, 도망 다니기에 급급하고, 마법 능력을 제대로 한 번 써먹지도 못하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가 주인공인 <위키드>가 명작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이 세상에 많은 엘파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만 해도 남들과 다른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 못한다. 유독 작은 눈, 약한 체력, 예민한 성격. 특히 작은 눈은 엘파바의 초록 피부처럼 어렸을 때부터 싫었다. “넌 눈이 작네. 그래서 예쁘다.”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앞으로 눈 작은 아이를 만나면 꼭 그렇게 얘기해줘야지 (주먹 불끈). 아무리 친구들이 “넌 약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아픔과 마음을 더 잘 느낄 수 있어. 작가로서 얼마나 장점이니?”라고 날 설득해도, 난 여전히 강철체력이었으면, 좀 무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을 쓸 때도 항상 그 누구처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야 알았다. 그 누구가 바로 나라는 걸.
그리고 또 나에게 있는 평범하지 않은 건 뭐가 있을까? 숨기고 싶은 것. 내 부모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 하지만 나만은 사랑해주고 내 행복을 위한 특별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그것. 나의 초록색 피부, 그건 뭘까? 초록색이라 더 아름다운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