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올비의 삼막극 <아슬아슬한 균형> - 아그네스의 이야기
에드워드 올비는 <바닷가 풍경>, <키 큰 세 여자> 그리고 오늘의 연구대상 아그네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세 차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현대 연극의 거장이다. 우리나라에선 <미묘한 균형>으로 번역됐지만, 작품 정독 후 고민 끝에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정했다. '미묘한'보다 더 피부에 와 닿게 표현하고 싶었다. 1966년 9월 12일 브로드웨이 마틴 벡 극장에서 오픈한 이 삼막극은 은퇴 후 도시근교에 사는 아그네스와 토바이아스의 이야기다.
아그네스는 50대 후반의 교양 넘치고 매력적인 여인이다. 토바이아스의 아내, 줄리아의 엄마, 클레어의 언니라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손에 데미타스 컵이라고 불리는 에스프레소용 커피 컵을 우아하게 집어 들고 그녀의 첫 대사로 극의 시작을 알린다. 냉소적이지도 슬프지도 않지만 뭔가 아쉬운 듯한 옅은 미소를 띠고 부드럽게 토바이아스에게 얘기한다.
아그네스: 내가 알게 된 가장 믿기 힘든 사실은 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그닥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그 사실은, 사람들 말대로 내가 어느 날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쉽게 정신줄을 놔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물론 내 생각에 내가 당장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얘긴 아니지만.
뭔가 신경에 거슬리는데, 체면상 드러내 떠벌리지도 못하는 일이 있어 보인다. 남편한테 한바탕 퍼붓고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은지 은근슬쩍 떠보는 거다. 토바이아스는 그녀처럼 부드럽고 교양 넘치게 이렇게 대답한다.
토바이아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신보다 더 정신이 멀쩡한 여자는 이 지구 상에 없으니까.
한 마디로 '당신의 불평을 듣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나쁜 남편도 되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지?'라는 입장의 그가 할 수 있는 최고로 영리한 받아침이다.
여기서 잠시, 에드워드 올비의 대본을 읽으며 감탄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첫 대사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인생을 꿰뚫는 그의 통찰력 넘치는 문장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명대사란 감성을 자극하는 듣기 좋은 말장난이 아니라 캐릭터가 녹아있고 통찰력이 넘치는 것이어야 함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아랑곳 않고 그녀는 클레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인 데다 자기가 베풀어주는 호의에 대해 전혀 고마워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클레어가 내 동생이라니! 아마도 어제도 한 바탕 한 모양이다. 클레어가 등장하자 줄리아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피한다. 언니가 사라지자 클레어 역시 그녀의 퍼스낼러티를 확실히 보여주는 대사를 내뱉는다.
클레어: (토바이아스에게) 아그네스를 죽여버리는 게 어때요?
나라도 저렇게 막말하는 동생 싫다. 줄리아도 그녀의 골칫거리. 네 번째 결혼에도 실패하고 컴백홈을 하겠다고 하니 첫 대사에서부터 자기가 곧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근데 뜻밖의 손님이 들이닥친다. 절친 부부 에드나와 해리. 집에 있는데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무서워져서 피신 왔다며 무작정 빈 방을 내놓으란다. 절친인데 어떻게 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아그네스는 줄리아를 위해 준비해뒀던 줄리아의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는데, 여기서부터 이 가족의 멘붕 대참사가 시작된다.
여느 가족 같았으면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며칠 밤쯤 딸의 방을 내주는 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땐 경제적으로 안정된 문제없는 집처럼 보이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줄리아는 자기 방을 빼앗은 아버지의 친구 부부를 침입자로 간주한다. 쫓아내기 위해 총까지 들고 나타나서 ‘당장 내보내. 당장 내보내’ 소리를 질러댄다.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토바이아스는 친구를 집에 묵게 하고 싶지만 가족과의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그 의견을 관철시킬 만큼 강력하게 어필하지 못한다.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 돼야 직성이 풀리는 아그네스는 가족을 배후에서 조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결과의 책임은 남편에게 물어 상황을 악화시킨다. 아웃사이더처럼 사는 클레어는 방관자다. 작가는 이렇게 disfunctional family (역기능 가족)의 모습을 아슬아슬한 균형, 먼지만큼의 문제라도 생기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과연 균형이라는 게 맞춰질 수 있을까?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왜 우리 요즘 워라밸, 일과 개인의 인생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어디선가 본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할 때 균형... 참 잡기 어렵다. 큰 사고 몇 번 나면 그제야 제법 몸이 자전거와 친해진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인생 또한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넘어지면 발딱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균형은 누가 잡아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잡아야 한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온전히 나 혼자 넘어지고 무릎 깨지고 다시 출발하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내가 균형 잡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하지만 아그네스의 균형이론은 다르다.
아그네스: "모양을 유지한다" 이런 말 들어봤어?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변화나 변경으로 오해하지. 근데 여기서 포인트는 유지야. 우리가 무언가의 모양을 유지한다고 할 때, 그 모양 그대로 유지해야 해. 우리가 그 모양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아닌지는 다른 문제야. 우리는 그 무엇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유지해야 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지 않아. 우리는 유지하고, 그대로 멈춰있어야 하지.
그리고 이 가족의 균형을 잡는 버팀대가 자기라고 말한다. 균형을 잡기 위해 조율하고 변화하는 대신, 그저 무너지지 않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삶을 아그네스는 평생 가족에게 강요해온 것이다. 아슬아슬한 균형의 원인 제공자는 그녀다. 만약 그녀가 토바이아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뒤에서 조정하려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풀어갈 수 있게 기다려줬다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내버려 뒀다면? 클레어에게 술을 끊고 자기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면? 줄리아가 첫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스스로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른 이유를 찾고 다시는 실패하지 않게 배울 수 있게 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도움이 필요한 아버지 친구 부부에게 자기 방 하나 양보 못하는, 누구와도 함께 살 수 없는 괴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법을 터득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갈 곳이 없어 찾아온 친구 부부를 따뜻하게 맞았겠지. 이들의 관계가 진정한 인생친구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을 것이다.
발란스가 잘 잡힌 사람, 잘 잡힌 가정이란, 시련과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함께 도와 그걸 잘 극복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유연해지고 견고해진 사람이나 그런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발란스가 잘 잡힌 사람일까? 내 자전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고 있을까? 답은 그렇다. 꿈을 꿨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경제적인 형편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자 하고 뉴욕까지 오는 대사건 하나는 제대로 쳤으니까.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느라 휘청휘청 아니 여기로 휘익 저기로 휘익 날아가 떨어지길 아직도 반복하고 있으니까. 이젠 잘 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브런치 연재도 시작했으니까. 마음이 아픈 날, 힘든 시간을 가볍게 넘기는 법을 연습하고 있으니까. 분명 난 아직도 열심히 균형 잡기를 시도하고 있다. 오늘의 결론 – 넘어져본 사람만 균형을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