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남편과 시대 어른들은 살림도 육아도엉망인데 직장까지 다니려니 너만 힘들지 않느냐며 사표 내길 종용하니 마음도 흔들렸다.
아침이면 간신히 일어나 세수하고 출근하기 바쁜 데다 아침밥을 거르고 점심을 왕창 먹으니 건강도 안 좋아졌고 살도 찌기 시작했다.
주부가 그러니 살림은 엉망이었고, 도우미 할머니에게 맡긴 3살 딸아이는 툭하면 감기에 배탈에 병원에 가기 바빴다.
결국 20대 후반, 천직인 줄 알았던 교직을 6년 10월의 경력을 갖고 3월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다람쥐처럼 반복되는 날들이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늦잠도 자고, 낮잠도 잤다.
하지만 전업주부라고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에게도 좋은 엄마라는 보장도 없었다. 살림이 서툴다보니항상 헤매었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놀고먹는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계획된 동선을 따라 전근을 갔고 착실히 살았다.
워킹 맘으로 똑 부러지게 살아가는 친구가 부러웠다.
모두 앞장서 가는데 나만 뒤로 후퇴하는 것 같았고, 삶은 갈길 잃은 돛대처럼 흔들렸다.
겉으로는 둘째도 낳고 잘 적응하는 줄 알았지만 심한 무기력증을 겪으면서, 유일한 대화 상대인 친구를 찾아가곤 했다. 퇴근시간에 맞춰 친구 집에 가서 종일 무료함을 수다로 풀어내며 징징거렸다.
그때 친구가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임용고시제도가 생겼으니 시험을 보라고 권유하며 학교교육과정 한 권을 갖다 주었다.
덕분에 임용고시 3회에 합격해서 만 5년 만에 교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비로소 깨달으면서 하루하루를 소홀이 보내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많이 웃었고, 아이들과 함께 했을 때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30이 넘어 뒤늦게 대학원에도 진학한 것도 전문직으로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현장에서, 교포족으로 지내는 선배교사들을 잘 나가는 후배들이 뒷방 늙은이 쥐급하는 걸 보며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50이 넘었을 때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30여 년을 교직에서 정말 베테랑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승진은 별개였다.
20대와 30대에는 못 느꼈던 실감 나는 현장의 실제 모습이었다.
그즈음 친구는 도청소재지 인접지역으로 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k대학부속초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k대부속초는 해마다 연구학교처럼 할 일도 많을 뿐만 아니라 교대의 졸업생들이 그 학교에서 실습을 하였으니 교사들은 일반교사가 아니 전문 장학사와 같은 코칭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엘리트들만 모여 있어 승진 바로 직전이나, 빠른 길을 가기 위한 날고뛰는 사람만 근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곳 발령을 받았다고 하면 마치 승진이 눈앞에 놓인 것처럼 축하해 주었다.
40을 목전에 두니 잘난 후배가 가끔씩 들이받았고, 별스럽지 않게 넘겼는데 그게 별스럽지 않은 것이란 걸 연식이 갈수록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의 5년이란 공백기는 죽어라 해도 동기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근무경력에도 밀리고,
벽지 점수도 없고,
연구점수도없고,
준비가 안되었으니 근평이나 연수점수도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선배들에게 돌아갔다.
누구에게 물어보려 해도 선배들은 선배들대로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느라, 동기들은 동기들끼리 경쟁상대였으니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기들 중 선두에 서 있는 친구는 내가 경쟁상대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그나마 정보를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휴일마다 친구가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갔다.
친구의 학교는 휴일도 반납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반절은 넘었다.
과로사하기 딱 좋은 그런 곳을 보며 이리 일하니 빠른 승진은 당연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갈 때마다 지역특산물을 사들고 오는 날보고 친구는 부담스럽고 일하는데 지장을 준다며. 오지 말라 했지만 근 두 달 내내 쫓아다녔다.
동기들과 함께하려면 근무경력에서는 잡을 수 없으니, 궁리한 것이 전문직(장학사)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문직에 응시하려면 7년 이상 근무경력과 연구점수, 부장 점수, 현장에서의 인성도 필요했다. 그리고 지역교육청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니 내게 필요한 건 연구점수였다.
난 부족한 연구점수를 받으려고 그렇게 친구를 쫓아다닌 것이다.
친구는 그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연구통이었고, k대부속초에서 연구부장을 담당하고 있어 경력만으로 올라온 교감이나 교장보다 그 실력은 인정을 받았었다.
계획서와 보고서의 서론, 본론, 결론의 흐름을 어떻게 잡는지 감도 잡지 못했고,
4월 정도 계획서를 제출하고 9월이나 10월경 제출하는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일을 추진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그 흐름은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친구는 정말 주고 싶지 않았다며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이미 전국대회 1등급 받았던 자신의 계획서와 보고서 사본을 주었다. 시도교육청에 탑재된 것은 100%가 아닌 30-40%의 요약분이었기 때문에 그걸 보고 흐름을 파악한다는 것은 웬만한 경험자가 아니면 어려웠기 때문이다.
친구가 준 것도 마무리가 조금 덜 된 10%가 미진했지만 그래도 90%짜리 사본을 줬다는 것은 자신의 노하우를 그대로 전달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확실한 멘토가 되어준 것이다.
그걸 받아 들고 집에 와서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ㅡㅡㅡ보름이상을 들여다보니 겨우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친구에게 친한 친구이자 스승으로 대 하겠다고 말했고 사실 그렇게 대했다.
길잡이가 되어준 친구의 도움으로 난 도에서의 연구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그다음 해에는 전국대회 입상 등 각기 다른 대회에 도전해서 일 년에 2회씩 입상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다음은 쉬웠다.
더구나 친구의 멘토 스킬은 예상외로 엄청 높았으니 난 운이 좋았던 것이다.
친구가 20년 이상 걸어온 길을 난 1~2년 만에 지름길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교사의 생명이라는 도수업연구대회 1등급으로 통과하고 나니 친구는 멘토를 그만 종료했다.
알아서 스스로 가라며 돌아섰다.
아무것도 몰라 쩔쩔매던 내가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집어낼 만큼 성장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멘토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반교사가 전문직 근무기간이 빠르면 2년 이상이면 교감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었다.
교장 적체 시 교감이 전문직으로 2년 근무하면 교장으로 빨리 나갈 수 있어 교감 출신이 전문직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전문직은 1년에 한 번 시험이 있었는데 바늘구멍 뚫기만큼이나 좁았다. 도 전체에서 적을 때는 2명에서 많을 때는 10명 정도로 해마다 정원이 달랐다. 응시자격 자체가 지역교육청의 추천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자체에서 걸러졌지만 보장된 승진자리였기에 그만큼 어려웠던것이다.
일반시험(1차ㅡ필기, 논술, 2차ㅡ현장 실사)과, 특별시험(1차ㅡ논문, 2차ㅡ현장실사)으로 진행되었다.
일반시험은 1차만 통과하면 95% 합격했다고 보면 된다. 현장실사는 그 학교로 심사팀이 불쑥 찾아가 동료들에게 응시자의 인간성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일단 전문직 시험을 보기로 작정했으면 평소에도 모난 행동을 하면 안 되었다.
인성에서 떨어질까 하겠지만 내가 아는 교감선생님은 2회 모두 1차 시험엔 합격했지만 인성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걸 봤다. 결국 경력으로 뒤늦게 교장이 되었지만 그 도에서 3대 악 교장으로 손꼽혔던 전설 속의 인물이었다.
특별시험은 친구처럼 엘리트 교사이거나 교감들이 응시했고 응시는 사실 형식적이었다.
특별시험은 이미 필요한 예상인원만 응시하고 뽑았지만, 일반시험은 각 교육청에서 한, 두 명의 추천을 받아도 최소 20명 이상이 시험을 봤기 때문에 떨어질 확률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응시 자체가 지역교육청의 추천으로 걸러지긴 했지만 보통 20여 명이 해마다 일반시험에 응시한 것이다.
tip :
1) 교포족 : 승진을 포기하고 근무하는 교사를 말함
2) 떨어져도 좋으니 일반전문직 시험을 보길 권한다. 일년동안 교육관련 책을 섭렵하다보면 어느 새 훌쩍 자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알게 된다.
3) 아무리 빨라도 근무경력.연구.연수 등을 갖추었을 30대중반 이상 나이가되니 그 때는 스폰지처럼 쭉쭉 받아들일 나이다.
4) 그렇게 최소2년이상 공부하면 교육과정의 오류나 교육법, 학교에서 추진하는 일에 대한 잘못도 잡아낼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니, 어디에가도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5) 인정받는 사람은 상사,선배,후배 심지어 학부모에게도 조리있게 뚫고 나갈 수 있으니 교육현장에서는 두려울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