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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교감과 미운 오리 새끼

by 블랙홀

그동안 한번 전근을 가면 5년을 근무했던 나름의 원칙을 깨고 만 2년 만에 자리를 옮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벽지 점수와 도지정연구학교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교육청에 근무하던 또 다른 동기가 귀띔을 해줬기에 그 학교로 내신서를 냈고 이동을 했다. 다만, 그 학교의 교감은 ㅇㅇ에서 3대 악질 교감으로 유명하니 조심하라는 얘기를 조언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는 3년을 근무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진 곳이었다.

출근시간만 1시간, 퇴근까지 하면 하루 2시간을 길바닥에 버려야 했고,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막내와 고3으로 올라가는 수험생이 있음에도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전임해간 학교는 시 지역에 있는 유일한 벽지 점수에 농어촌 점수 그리고 그 해 도지정연구학교로 암암리에 내정되어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전근을 해서 들어가니 준비된 잔칫상에 초대를 받지 않았던 죄로 고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나와 같은 목적으로 들어간 교사들이 6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모두 부장 보직까지 내정되어 일종의 초빙교사처럼 들어온 것인데 난 멋 모르고 들어간 것이다.


내 동기 a는 교무로, 전년도 타 연구학교 발표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후배 b는 연구 부장직을 주어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남은 4명은 경력이나 연구실적으로 나와는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니 그중 한 명은 나 때문에 부장에서 밀리게 된 것이다.

결국 교감이 데려왔다는 c는 그 해 보직을 받지 못했고 그 화살은 모두 내게 돌아왔다.

그렇게 가장 힘이 없는 과학부장은 내게 돌아왔다.


전입 환영회식에서 교감은 정색을 하고는 무슨 목적으로 그 학교로 왔느냐며 닦달했고, 예의상 건네는 내 술잔조차 거부했다. 배움을 받고자 왔다고 했지만 그 대답은 콧방귀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동료들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미리 감지한 듯 교감이 있는 자리에선 말조차 걸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교감은 날 갈구기 위해 근무하는 것 같았다.

교감 직함을 달고 전문직에 응시했지만 2차 인성 실사에서 번번이 떨어진, ㅇㅇ도에서 악질 교감으로 소문난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저 노력하면 될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전근을 간 그 해부터 연구점수를 채우기 위해 박차를 가하면서 교육청 장학요원으로 차출되었고, 수업연구대회 인성 사례도 함께 준비했다.


아직은 부족함이 많으니 3년을 목표로 일반 전문직 시험도 시작을 했다.

특별히 내세울 게 없으니 특별시험은 못 보고 일반 실험을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한 시간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내 계획은 40대 중. 후반까지는 전문직으로 나가고 늦어도 50이 되면 교감으로 나가는 걸 목적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감에게는 본인이 전문직에 나가지 못했으니 그 길로 가려는 내가 더 달갑지 않고 시답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본인이 공부를 하다 보니 교육법은 꿰뚫고 있었기에, 경력으로 승진하기로 방향을 바꾸면서부터는 근평을 주는 교장이나 장학사들에게도 수 틀리면 한바탕 대드는 걸로 유명한 분이었다.

나중에 내가 겪어보니 이해가 갔다. 그만큼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서 그랬다는 걸.




근무를 하면서 황당한 일들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근해간 학교 분위기 적응하랴, 수업하랴, 수업연구대회와 실천사례준비로 머리가 지진이 일어날 지경인데, 과학부 예산도 없었는데 과학실과 외부 과학기구 중 고장 난 것은 모두 재 정비하라고 지시를 했다.


한 달 동안 야근을 하며 고장 나고 먼지 앉은 실험기구를 깨끗이 닦아서 라벨을 새로 붙이고. 외부 과학기구는 사비를 들여 다시 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과학기구를 닦는 것은 엄두가 안나 학급 엄마들이 도와주었고, 외부 과학기구 정비는 스쿨버스 운전기사님이 도와주셨으니 당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학급별 돌아가며 하는 수업공개 후 평가 시에는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날 골탕먹이는가 하면, 환경정리판은 어떤 교육목적을 갖고 저 색을 선택했는지 질문을 해서 당황하게 만들었다.


몇 년을 묵혀두었던 전교의 계단이란 모든 계단에 위험 안내표지와 계단 중간의 돌아가는 코너는 창의적으로 고안해서 다시 환경을 정비하라고 했다. 난 환경부도 아니었건만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난 초대하지 않은 잔치에 불쑥 들어왔으니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 놓고 나면 맘에 안 든다며 또다시 하라고를 되풀이했다. 그래서 이미 연구학교를 치러서 정비가 잘 된 학교를 찾아가 벤치마킹을 하기도 했다.





수업 후 쪽 시간을 틈타 책을 봤고, 퇴근 후에는 독서실에 가서 밤 11시까지 전문직 시험을 준비했다.

엄마이자 주부는 삼 년 동안 탈출하기로 하고 아이들과 살림은 친정부모님이 도와주시는 걸로 이를 악물고 준비했다.

40이 되어 뒤늦게 시작한 만큼, 5년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다른 사람이 걸을 때 난 100미터 전속으로 달려야 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계획서나 중간보고서 등의 공문 마감 날까지 교감은 결재를 안 해주고 출장을 가버리는 것이다.

교감의 결재가 1차 결재 거나 전결로 마무리되는 것이 태반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공문을 갖고 장난치는 것이었다.

때로는 출장지까지 좇아가서 간신히 기한을 마치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교장샘에게 결재를 해 달라고 쫓아갔다.

교장은 한없이 좋은 분이었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극노하는 교감이었기에 교감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점심시간에도 교장이 먼저 내려와 교감에게 급식실가자고 하면 퉁명스럽게 동행하거나 아님 먼저 가라고 따돌리는 분이니 당시 교직 15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그런 교감은 처음 봤다.



지금이야 상사의 갑질도 있고 교사의 인권도 있었지만 2000년대 초, 중반에는 그런 말 조차가 생소했다. 가끔씩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바른말을 해서 대신 속이 뻥뚫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교총은 선. 후배가 얽혀있어 조금은 부당한 지시라 할지라도 상사의 지시는 곧바로 복종의무에 해당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했다.

아침마다 교무실에 들러 배꼽인사를 했고, 마시든 안 마시든 모닝커피를 준비했는가 하면, 조간신문도 챙겨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아두었다. 교감의 책상은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매일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교감은 알고도 모른 척 무관심한 척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교감에게 당하면 당할수록 내 멘탈은 더 강해졌고 단단해졌다.


무관심으로 대하던 동료들도 뒤돌아서서는 그분 성격이 워낙 그러니 맘에 두지 말라며 날 위로해줬다.

동기였지만 일면식도 없었던 동기 교무부장은 교감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부터 교감과 호형 호재 하던 사이였기에 우리의 불편한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교감은 호불호가 분명해서 잘 지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극과 극으로 대한다는 것도 알려줬고, 가끔씩은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눈치껏 알려주기도 했다.


교감에게 시집살이당하는 내 처지는 입과 입을 거쳐 교육청에 까지 알려졌다니, 당시 호사가들의 대화의 주제가 되기도 했단다.


운동장 조회를 나 갈 때는 교감 곁에서 붙어서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때로는 나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는 듯 뻥쪄서 쳐다보기도 했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친부 앞에서 계모에게 학대당하는 불쌍한 콩쥐처럼.


하지만 나이 40이 넘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은 가슴 한편에 덩어리가 되어 자라고 있었다.

출. 퇴근하는 차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렸는지 모른다. 내 처지가 한심하고 안쓰럽고 치사해서.

하지만 차에서 내린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티를 내지 않았다.

나중에 승진을 못해서 동료들에게 뒷방 늙은이처럼, 그림자처럼 당하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워서 그랬는지 모른다.


장학요원 활동도 하고 수업연구대회와 실천사례 준비도 차근차근해가며 퇴근 후엔 독서실에서 살았다.

해 뜨는 걸 보고 출근해서 별이 뜨는 걸 보고 퇴근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꼬투리를 잡는 걸 피하기 위해 퇴근 후나 주말도 없이 독서실에서 교육과정이나 지도서, 교육법을 철저하게 공부했고 그래서인지 송곳 질문도 꼬박꼬박 반론을 펼치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곤 했다.

지시한 일은 며칠을 야근해서라도 마무리를 짓 곤했으니 트집 잡힐 일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회의를 하건 지시를 하건 교감은 주시를 하며 날 떠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절망한 것은 교감이 전근 온 지 채 일 년이 안될 걸 알고 앞으로 부대낄 시간이 많다는 것에 우울했고, 교장은 방관자 밖에 되지 않는 것이 더 우울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름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교감에게는 한없이 살가운 후배이자 부하직원으로 깍듯하게 대했지만, 다른 동료가 내 영역 안으로 침범하는 것에는 결코 참지 않을 테니 누구든 한 명 걸리면 내 성깔을 보여주리라고...... 벼르고 있었다.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여름방학 통지표를 쓰게 되면서 사건이 터졌다.


교무회의에서 교무부장인 내 동기가 통지표 표기 영역을 다르게 설명하길래 내가 교육법이 바뀌었다며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동기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뻘게져서 교감이 내게 하던 것처럼 화를 냈다. 때는 이때다 하고 난 같이 고성을 터 뜨렸고 분위기를 짐작한 20 여명의 동료들은 자리를 피해 나갔다.


교무실엔 교감과 나, 교무 동기 셋만 남게 되었다. 그동안 참았던 걸 한꺼번에 쏟아내 듯 서류철과 교무수첩은 허공으로 날아갔고, 삿대질과 함께 고성은 교무실과 같은 층의 교실까지 들릴 정도로 울려 퍼져 나갔다.

어쩌면 그건 교감을 향한 간접 화풀이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건 본인 앞에서 그리 험악하게 싸우는데 교감은 그 광경을 못 본 척 신문만 펼쳐 들고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을 찾아 어른 앞에서 큰 소리를 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걸 잊지 않았고, 수업도 안 들어가고 숙직실 앞에서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는 동기를 찾아가 사과를 했다.


아무래도 후배들 앞에서 교무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것은 잘못했지만 난 그 행동이 의도적인 것으로 '나도 성깔 있는 사람이니 건드리지 마' 하는 일종의 경고성 이었기에 쏟아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렇게 한 학기는 지나갔고 난 그동안 많이 컸다는 걸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우선 멘탈이 더 강해졌고, 교감에게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시작 한 교육이론 공부는 훗날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되었지만, 그 이면에서 독으로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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