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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과 퇴직의 기로에서

by 블랙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확정도 되지 않았는데 4개월 동안 긴 병가에 들어갔다.

일을 할 때의 4개월과, 일을 하지 않을 때의 4개월은 완적 극과 극이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로 공황 증세까지 있어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그 친구가 운영한다는 신경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가끔은 숨도 쉬지 못해 툭하면 119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일반행정직으로의 근무는 내게 맞지도 않았고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난 전형적인 a형에다 성격마져 infjㅡa형이었다.


연말이 가까워오자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벌어졌다.

그저 다른 파견교사처럼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을......


대체로 파견교사는 30대 초반의 5~6년 차였지만 난 의문점에는 일일이 따지고 드는 경력 25년 차 인 코 센 교사였던 것이다.

거기에다 승진시험의 비리를 알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교육현장을 떠나 교육원으로의 파견을 자처한 터였기에 그 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당시 도에서 일 년 예산을 1억 5천만 원을 받아 내 프로그램에만 지출하고 결과를 보관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같은 부서의 6급 실장과 5급 부장은 일일이 딴지를 걸어 사용치 못하게 했다.


특별파견 3호직으로 별정직에 해당했지만 결재는 같은 부서의 실장과 부장, 교육원장의 결재를 받아 운영해야 했지만, 실장과 부장 선에서 걸리니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무산되는 일이 종 종 있었다.


한국어 강사, 예절강사, 기본 학습 프로그램 강사, 체험학습에 고향에 앨범 보내기, 문화유적지 탐방, 김장행사 등 일일이 수당 책정해서 강사 섭외하고, 운영에 필요한 재료까지 신경 써야 하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더구나 행사 때마다 사진을 찍어 따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려니 이래저래 부딪치는 것은 결국 운영비였다.


보조강사를 쓰고, 홈피 운영자를 알바로 쓰려니 사사건건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래서 내 예산은 10월이 지나도 60%밖에 지출을 못했다.


나중에 예산이 남았다고 따로 원장실에 불려 가니 행정직은 예산이 남으면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단다. 아니 칭찬은 못해줄망정......

그리고 남은 예산은 빨리 소진해야 하니 다른 부서로 돌려주라고 했다.

난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실장과 부장은 그런 나를 구슬렸다.

그 들은 승진 평가를 원장에게 받으니 수직적인 체계라서 명령은 받든다는 식이었지만 내게 원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국민이 아니 내가 내는 세금이 일선에선 저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연말이 가까워 올수록 엉뚱한 도로를 갈아엎어 버리는 지자체의 행태도 왜 그런지 이해가 갔다.


그 날이후 부서원들과 나는 물과 기름처럼 빙 빙 돌았다.

그러지 않아도 20여 일 이상의 연가 외는 따로 방학이 없어 심신이 지쳐있던 터라 더 예민했는지도 모른다.

방학은 재충전의 기회로 소진한 체력을 가다듬은 후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환경도 맞지 않았다.


둥글지 못한 성격 탓에 그렇게 부딪친 후 근무 중 호흡곤란으로 119에 실려 응급실에 실려갔다.

난 그렇게 병가에 들어간 것이다.


부장 등 같은 부서에서 여러 번 병문안을 왔지만 주치의의 '면회 금지'조치가 떨어져 그냥 돌아가곤 했다.

아마도 근무 중에 일어난 일이니 신경이 쓰였나 보다.


3주 후에 퇴원을 했지만 교육원에서는 몸조리나 하라고 했다. 내 담당 일은 다른 부서원들이 나누어서 하겠다며.

그렇게 되어 실질적인 교육원에서의 일은 미리 마무리가 된 셈이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면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 일어났다. 출근시간 9시를 맞추기 위해 추월 전쟁을 안 해도 되고, 칼치기를 했다고 차창 문을 열고 쌍욕을 해대지 않아도 되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자고 싶으면 언제든 암막커튼을 치고 잠이 들었고, 심심하면 인근 사우나에 가서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었다.


자식들은 그런 나를 한심한 듯 쳐다봤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지난 25년 간 쉼 없이 살아온 시간을 보면 이젠 나를 위해서 적당한 게으름쯤은 피워도 된다고 생각했다.


동기들이 목청껏 수업을 할 동안 난 잠을 잤고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 친하게 지낸 이웃도 없었고, 다른 사회친구들이 없어 심심했다. 퇴근 후 쉬어야 할 동기들을 저녁마다 불러낼 수도 없었다.


늦잠을 자는 것도, 사우나에서 수다를 떠는 것도, 오일 장에 들러 장 구경을 하는 것도 일시적일 뿐 왠지 할 일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중에 짬짬이 갔던 여행을 생각하며 T/C자격증이나 받을 요량으로 인근 여행사에 취업을 했다.

여행사 근무 6개월의 경력이 있으면 관광학과 졸업생처럼 외국여행 시 단체를 인솔자인 T/C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여행이나 하고 돈도 벌 겸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오전 10시 출근, 주는 점심 먹고 오후 3시 퇴근을 하면서 월급은 백만 원만 받기로 했다. 하루 5시간 정도 근무하는 것은 내 생체리듬과 잘 맞았다.

늦게 일어나 출근을 하고, 종일 근무하지 않아도 되고, 경력도 쌓아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여행 프로그램을 체크하고, 행선지 상담해 주고, 비행기 티켓 대행하는 그런 정도였으니.


아직 퇴직처리가 안되었으니 현직 공무원 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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