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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일탈과 그 핑계

by 블랙홀

특별파견 3호로 교육원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했지만 여름이 지나자 그렇게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연가나 병가는 경력만큼 늘어났지만 여름과 겨울. 방학이라는 휴가도 없이 근무한다는 건 손해 보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좋게 말하면 건조한 직장생활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봉급만 타는 속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경력만큼 적지 않게 호봉도 올라가고 각종 수당도 늘어났다.

정근 보너스까지 일 년에 6번 나오는 보너스와 명절 보너스도 불만이 없었다.

더 좋았던 것은 20년이 넘으면서 연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것이 눈에 보였고, 만 62세 정년퇴임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건 그 많은 직장 중에 장점 중의 장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정년까지 14년이 남았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넘는 긴 시간이 남아 있었고 매달 17일이 되면 통장에 봉급은 들어왔다. 때론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넘어가도 봉급은 잊지 않고 꼬박꼬박 들어왔다.

한 달을 탈탈 털어 쓴다 해도 다음 달엔 어김없이 들어오니 저축이란 것도 차츰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시험에서 떨어진 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자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리 자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 6년이 길었지 중학교 3년, 고등 3년은 입학했나 싶으면 다음 진학 학교를 찾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만원만 줘도 " 감사합니다." 하며 배꼽인사를 하던 아이들이 오만 원을 줘도 시큰둥할 만큼 훌쩍 커버렸다.


현실로 돌아오면서 난 은퇴 후를 걱정했다.

아마도 승진을 했더라면 심각하지 안 했을 텐데, 교포족이 되니 노후가 걱정되어 앞당겨 지레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처음 교직에 발을 내딛고 15년이 넘을 때 까지는 어느 은행의 금리가 높고, 어느 곳이 지점장 특별금리가 좋은지에 따라 철새처럼 움직였다. imf때에는 금리가 10%를 훌쩍 넘어 오히려 들어오는 이자로 수입이 쏠쏠했다.

그리고 주식, 국채, 금, 심지어는 달러까지 모으면서 금리의 향방을 쫓아다니느라 머리를 쥐어짰다.

당시에도 차명을 금지하기는 했지만 은행에선 오히려 암암리에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줬고 지금처럼 살벌하지도 않았다. 우대금리 금액을 맞추기 위해서 친정부모님, 동생, 미성년 아이들까지 총동원해서 금액을 분산시키는 공을 들였다.



돈은 일정 금액까지 오르기가 어렵지 그 이후는 참으로 쉽게 불어났다.


남편에게 곁눈질로 배웠던 경매를 혼자 해 보려고 퇴근 후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한 적이 있었다.

재수한 번 안 하고 대학에 입학했고, 삼십이 넘어 임용고시를 합격해서인지 시험을 보면 모두 합격하는 줄 알았는데... 처음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고 허탈해하던 그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 이후 난 공인중개사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시험엔 떨어졌어도 그 기본 흐름을 기억하고 있어 행정고시 출신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토지주와 건물주가 다른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꼬마 건물을 싼 가격에 경매 낙찰받았다. 남편 몰래.


남편은 그즈음 부동산보다는 사채시장을 기웃거렸다.

땅은 도망가지 않지만 돈은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 모르고, 말이 사채지 아는 지인들에게 선 이자에 어음이나 가계수표, 차용증을 받고 빌려주는 수준이었다.

경매로 받은 땅 중에는 제법 좋은 땅도 있었지만 인내가 부족한 남편은 그걸 갖고 있지 못하고 수수료만 챙긴 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곤 했다.

나사렛대학교 근처의 너른 포도밭은 아이들 생각해서 묻어놓자고 귀가 따갑게 얘기했건만 당장 눈앞에 있는 몇 푼의 이자에 넘어가 홀라당 팔아버렸다. 지금은 J아파트가 대단지로 들어서 있다.


가끔씩 대출이 막힐 때는(직장생활을 안 하니) 공무원인 나를 앞세워 대출을 받아서 사채로 빌려 주고 하는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그런 남편을 보고 난 죽어도 돈거래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혼자 자생하기 시작해서 경매로 꼬마 건물을 낙찰받았고, 기존 세입자에게 그대로 통임대를 놓아 보증금을 제외한 한 달 월세가 내 봉급의 2배가 넘었다.


보증금을 다시 굴리고,

월세는 월세대로 받아 통장에 넣어두고,

월급은 월급대로 모아 복리 예탁을 했다.

애가 셋이란 이유로 꼬박꼬박 남편에게 생활비를 받으니 주머니가 여유롭다 못해 넉넉해지기 시작했다.


내 간도 배 밖으로 나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일생 중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때였던 것 같다.

직장동료나 동기들은 부러워 죽겠다며 자기들은 언제 건물주가 되겠느냐며 한숨을 내쉬는 걸 보며, 실제 내 속마음은 그들이 부러웠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한꺼번에 두세 개를 건너뛰는 이는 빠르게 앞지를 수는 있어도 한 번 잘못 디디면 지하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의 아픔을 그들은 아직 맛보지 못했으니까.






모든 은퇴자들의 로망이라는 갓 물주 대열에 들어섰고, 7년을 보유한 뒤 뒤 매입가의 두배를 받고 꼬마 건물을 팔았다.

승진시험에 연거푸 3년을 떨어지고 난 후 내 관심사는 바깥으로 빙빙 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으로 위안을 얻었던 셈이다.

이젠 청렴한 공무원이 아니라 돈 맛을 알아버린 공무원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할 일만큼은 일주일에 5일을 야근을 한다 해도 제대로 처리하려 노력했다.

스스로 터득한 경험에서 오는 일에 대한 판단은 그만큼 깐깐해져 있어 얼렁뚱땅 처리하지 않으려 했고, 밖으로 맴도는 것을 상사나 동료나 눈치챌까 봐 더 열심히 했다.


꼬마 건물을 팔고 난 후 교육원으로 가기 전 사놓기만 했던 토지에 조금 더 큰 건물을 신축했고, 완공한 지 세 달이 지나지 않아 투자금에 +3억을 올려줄 테니 그 자리에서 팔라는 제의도 받았다.

누가 외골수 A형이 아니라 할까 봐 한번 소유하면 적어도 뭔가 변화가 있을 때까지 틀켜쥐는 소심한 성격이라 매도 타임을 놓친 채 14년이 되는 지금까지 쥐고 있는지 모른다.


머리 털나고 처음 신축한 곳이고 건물에서는 내 봉급의 3배가 넘는 월세가 나왔다.

신축하면서 시행사와의 마찰로 머리를 쥐어짠 터라 다시 또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건 잠시 쉬고 싶었다.

멀티가 아니라서 직장 일에 몰두하면 건물관리가 소홀해졌고, 건물관리에 몰두하다 보면 직장 일이 소홀해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은퇴한 선배들을 보면 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과 실력을 지녔어도, 사회에서는 숫자에 불과한 나이로 정년을 앞세워 그저 연금을 받으며 삼식이로 전락하는 걸 보며 나도 방향을 잡아야겠다고 심각하게 고민한 것도 한몫을 차지한 것 같다.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니 종일 소리를 질러대서 성대결절에 걸릴 일은 없었고, 서 있는 시간이 많아 퇴근 시 종아리가 퉁퉁 붓는 일도 없었지만, 일반 행정적으로의 근무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더 많았다.


한 시간 40분 수업이니 4시간이라면 160분, 5시간이래 해도 200분만 정신없이 지내고 나면 나머지 퇴근시간가지는 융통성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익숙하다가, 하루 8시간을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만 들여다보려니 시력도 나빠지고 윗배는 거부룩해서 소화도 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려해도 아이들 상황을 보며 뛰어갔다 뛰어들어와도 연가나 연가를 내면 누군가 대신 수업을 해주니 밀린 수업을 보충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교육원에서는 출. 퇴근 시간 외는 시. 분 단위로 쪼개서 동동 걸릴 일은 없었지만, 내게 주어진 업무는 쉬는 만큼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아 할 일은 그만큼 늘어났다.


더구나 학교에서는 필요한 학급운영비는 학년에서 일괄 처리해도 묻어갈 수도 있고, 카드를 사용해서 영수증 처리만 하면 행정실에서 알아서 뒤처리를 해줬는데.

교육원에서는 도교육청에서 주는 일 년 예산을 연초 계획서에 따라 사용을 하려 해도 건 건마다 직접 결재를 맡아 시행해야 했고, 사용금액은 결재를 맡아 보관하고 있어야 하니 단 1원의 오차가 있어서도 결재가 나지 않아 힘들었다.

예산이라는 것은 연초보다 단가가 오를 수도 있고, 도매업체나 거래처를 활용하면 단가가 낮아질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을 융통성있게 처리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어려웠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대부분 직속 선. 후배 또는 동기라서 견제는 할지라도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줬지만,

50여 명이 근무하는 교육원에서는 모두 일반 행정직에 파견교사는 달랑 혼자뿐이니 평소에는 어우러지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엔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25년 가까이 교직에서만 있다 퇴직하면 후회가 될 것 같아 다른 직군의 일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후회로 변하기 시작했다.


교육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었지만 성인을 상대로 하는 직군과 아이들을 대하는 직군은 뼛속까지 그 흐름도 정체성도 달랐다.

그 들은 날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 역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공통적인 사안을 갖고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도 힘들었다.


교사의 퇴근시간은 5시였지만 일반행정직은 6시라서 동기나 선배들을 만나는 것도 시간적으로 달라 만나기도 어려웠다.


핑계 같지만 그런 상황은 본업보다는 부업인 임대사업에 더 공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퇴근 후엔 아는 부동산에 들러 잡담을 하며 정보를 얻곤 했다.


그렇게 난 가족들과는 상의도 하지 않고,

내 멘토들에게도 입을 꼭 다문 채,

정년 14년을 남겨두고 퇴직을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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