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와 동기들, 가족들은 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언젠가 퇴직을 할 거라면 차라리 일찍 나와 사회에 적응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내 오락가락하는 판단력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25년 이상을 한 자리에 있던 경험치에서나 가능한 것들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 계급 승급되어 교감을 달고 나왔지만 자격증 없는 허울뿐이었다. 마치 군인이나 소방관들이 순직하면 한 직급 올려주듯이.
이미 4개월 이상을 빈둥거린 탓에 그 무료함을 충분히 느낀 상황이었지만 결정되어 공문으로 뿌려진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주변에선 한창 주식바람이 불 때였고 주변인 중 주식을 적극 권장하되 삼천만 원 이상은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처음엔 천만 원으로 시작했다.
연봉도 월봉도 볼 줄 모른 채 일봉이 전부인 줄 알고 그렇게 시작했다.
실시간 5초 그래프를 보느라 화장실도 가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묘하게 도박도 처음엔 따다가 갈수록 베팅액이 커지면서 거덜 나는 것처럼 단타를 하면서 며칠 만에 몇백을 벌게 되니 한 달 봉급보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천만 원이 오천만 원이 되고 억단 위로 늘어나면서 오전 8시 반부터 준비했다가 오후 3시까지 모니터만 보게 되었다.
장외도 알게 되었고 개장직후 오르다 오후 막장으로 갈수록 떨어지는 게 대부분이라 나도 그 방법을 썼다.
그리고 주식으로 상당액은 H엘리베이터에 묻어놓고 번 돈을 갖고 터키여행을 계획했다.
아이디어는 좋았던 것 같다.
신축보다는 재개발이나 리모델링이 대세일 것 같았고, 예전에 설치하지 않았던 3층이상은 웬만하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거라는 예상이었다.
사실 주변에선 리모델링 붐이 일면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곳이 꽤 있었고, h사는 s사와 양맥을 이루니 망해서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지 않을 거라는 심산에서였다.
H사에 몰빵을 하곤 계획했던 터키행 비행기를 타면서 잠시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장거리인 터키와 인도, 네팔을 거쳐 남미여행을 계획했던 터였다.
열흘이상의 일정으로 터키를 다녀와 컴퓨터를 들여다보니 하아! 주식은 반토막이 되어 있었다.ㅠ
조바심으로 밤잠을 설치다 보니 안될 것 같아 주식은 당분간 잊기로 했지만 이제 빠져나오고 싶어도 반토막 원금이 아까와 못 빠져나왔다.
그렇게 h사의 주식은 묻어놓은지 6년 만에 결국 30%의 손실을 보고 정리했다.
생각보다 사회에 나온 첫출발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하루 온종일 tv만 끼고 살다 보니 어설픈 정보가 사람을 망치는 데는 십상이었다.
방송에선 인플레이니 어쩌니 떠들어대고 금리는 날이 갈수록 곤두박질을 치니 불안하기만 했다.
투자를 한다고 연금이 아닌 일시불로 퇴직금을 받아 1년 예탁을 들어놓은 건 만기가 되어 가지만 적당한 투자처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지만 않다면 국채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알아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브라질국채가 유망주로 떠올랐다.
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그렇게 H사 주식에 손해를 보고, 브라질 국채에 일정금액을 넣어두니 실제 회전시킬 수 있는 자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식들이 커가니 생활비는 점점 늘어가고,
물가는 자고 일어나면 오르는 데다,
금리마저 떨어져 수입은 제자리를 맴도니 뾰족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직에 있는 동기들은 장학관이나 교장이 되었고 교포족이 아니라면 대부분 교감이 되었다. 치고 올라는 선두주자는 모 지역의 교육장으로 승진되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궁금했던 직업체험은 짧게는 1~2개월, 길게는 3개월 정도로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처음엔 교육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평생 교육원과정을 다녔다.
한국어강사, 숲해설가, 아동심리상담사, 다문화상담사, 어린이집 원장, 1급 보육교사 자격증부터 풍수지리도 6개월 동안 배웠지만 문제는 실생활에 제대로 접목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국어강사는 결혼이민자 대상으로 주 4시간 2회씩 6개월 강의로 끝냈고, 숲해설가는 체계적인 교육 현장에서 무한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적응을 하지 못했다.
수강생 태반이 대부분 어린이 집 원장과 일반인이었는데 수업실연에서 내 수업이 다소 강요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을 했고, 수백 종의 식물과 나무이름을 내로 외워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당시 같은 교육생 중 일부는 아직도 숲해설가나 숲 어린이 집 또는 숲박물관에서 정식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한 달 동안 하루 4시간 근무를 한건 내 수준의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종일 근무가 아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
사설 어린이 집 원장으로 오라는 러브콜을 받고 그만뒀는데... 어린이 집 설립자의 횡령사건으로 강제폐쇄되는 바람에 3주 만에 실업자가 되었다.
여행사근무경력은 있었지만 대부분 소규모라서 관심 있는 해외여행보다는 관광버스를 소유한 사장이 인근 회사의 출ㆍ퇴근 차량으로 움직이다 보니 빈사무실을 지키는 것이라 그 역시 흥미를 잃어서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장 오래 근무한 건 싸우나 청소였다.
당시 반려견을 세 마리 키우며 같이 뒹굴다 보니 몸에 반려견 특유의 냄새로 하루 일과의 마무리를 사우나에서 하곤 했다.
하릴없이 사우나에 죽치고 있으며 업장의 사장이나 세신사들과 수다를 떨다가 가끔씩 저녁에 하는 싸우나 청소를 거들어 주다 아예 고정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메인 청소아주머니가 세제로 닦은 부분을분사용 고무호스로 흔들어 씻어내면 끝이었다.
청소 마무리는 냉탕 물을 받아놓는 것이라서 싸우나의 열기로 흐른 땀을가장 깨끗한 첫물에서 첨벙거리며 노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매일 싸우나도 공짜로 할 수 있었고 월급으로 받은 30만 원은 세신사에게 마사지를 받는 데 사용됐지만 결국 돌고돌아 다시 세신사에게돌아갔다.
가족들은 멀쩡한 교직을 관두고 싸우나 청소를 하는 게 한심스럽고 창피하다고 했지만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제에 섞은 락스거품을 매일 씻어대다 보니 발바닥 껍질이 벗겨져 두 달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벽까지 게임하다 정오쯤 일어나는 불규칙한 생활로 다시 돌아왔다.
가끔씩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자책할 때도 있었지만 현직에 있을 때 심신이 너무 지쳐있어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한 눈을 팔았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에 돌아왔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결코 만족하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적당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난 그걸 몰랐던 것이다. 거기에 누가 뭐라 하면 안 듣는 척하다가 열심히 따라 하는 것도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처럼 줏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