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유달리도 더위가 빨리 찾아왔고, 푹푹 찌는 높은 습도로 짜증이 절로 나던 때였다.
같은 라인 아파트 1층에 사는 남편의 후배가 퇴근하는 뒤에서 불러 세웠다.
가끔 마주치면 목례를 하던 정도였는데 다짜고짜로 "형님, 요즘 일찍 오세요?" 하고 묻길래 얼떨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한숨을 쉬며 "형수님 같은 분도 없을 거예요." 하며 말끝을 흐린다.
느낌이 싸해서 자꾸 물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돌아서는 모습에서 왠지 불안감이 스쳤다.
사실 그즈음 남편은 교통사고 후 집 밖으로 빙빙 돌았고, 뭔가 변하긴 했지만 콕 집어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행동했다.
가끔은 홀로 계신 시어머니댁에서 잔다는 연락이 잦아진 터였다.
다음 날 시어머니께 '지난밤 아범 거기에서 잤느냐'라고 넌지시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효도를 하겠다는데......
난 그랬다.
큰 문제만 없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모른 척하는 아량도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쩌면 거짓말은 잠시 이탈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 도 생각했다.
내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배우자에 대한 신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불똥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막내를 낳은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한 남편의 전화벨이 크게 들렸다고 생각한다.
곁에 있었으니 수화기 너머로 남자 아닌 여자의 고음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난 귀를 쫑긋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안부 전화였지만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고, 미혼도 아니고 이미 결혼한 줄은 알았을 텐데 어쩌면 아내가 곁에 있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전화를 걸어온 여자가 궁금했다.
한동안 수다를 떨고 난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 없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동창생인데 고향에 왔다가 잠시 안부전화를 했다나 뭐라나.
그때 난 처음으로 따졌다.
적어도 아내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면 밖에 나가서 받든가, 아님 금방 전화를 끊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편은 험한 말을 하며 눈빛이 달라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눈빛.
그런 눈빛을 자주 봤지만 그 상대는 내가 아니라서 똑바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네가 뭔데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느냐'라며 자기도 사생활이 있다며 오히려 화를 냈다.
13년 동안 무난 무탈한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라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 같다.
남편은 들으라는 듯 시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현재 일어난 상황에 대해 속사포처럼 얘기를 했고, 시어머니는 동네 초등학교동창인데, 인근 친정에 왔다며 잠시 들러 남편의 안부를 물어 전화번호를 알려준 거라며 날 이해시키려고 했다.
확인이 끝나자 남편은 그 보란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화가 나면 그 화 때문에 더 심하게 화를 내고, 화를 내는 자신의 분에 못 이겨 더 소리를 지르는......
살면서 그런 험한 모습은 처음 봤고, 그 분위기에서 정말 내가 잘못했나? 잠시 회로를 굴려보지만 머리는 백지장처럼 하얘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급기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집어던지려는 것을 보고, 난 소리를 질렀다.
그걸 던지면 우린 끝장이라고.
그러니 던지지 말라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나를 향해 날아왔고, 정확히 머리를 맞히고 나가떨어졌다. oh, my god!!!
아이를 안고 있던 나는 거실바닥에 아이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가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우린 이제 끝이야'
그날 이후 '이혼'에 대해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픈 것은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출산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여기저기 출산의 흔적이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데 사생활 운 운 하면서 폭력을 쓰는 남자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주문처럼 외웠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을 댔다면 그 결혼생활은 이미 끝난 거라고 배웠기에, 그때부터 발톱을 숨긴 여우처럼 홀로서기를 할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