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부부

by 블랙홀

그 해 12월, 난 발칙한 탈출을 시도했다.


표면적으론 아이들 교육을 위한 것이었고, 내부적으론 결혼 생활을 정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모든 것이 프리패스로 넘어가던 편리한 생활,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기대대로 큰 아이는 대도시에 있는 유명 고등학교에 합격했고 나도 그 도시로 발령이 났으니 더 말릴 명분은 없었다.

적어도 남들에겐 아이들 교육을 위한 완벽한 주말부부로 지내는 모양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상황 짐작을 하고 전세로 보내라 했고, 난 2년에 한 번씩 학군을 바꾸는 건 아니라며 매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내 의도대로 학군이 좋다는 S동에 아파트를 매입해 줬고, 살던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나왔다.


어쨌든 아파트 두 채에 시어머니의 단독주택까지 세 채를 소유한 셈이다.

난 사고만 치지 않으면 만 62세까지 보장된 직장에도 다닐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홀로 설 준비는 된 것 같았다.

떠나기 직전, 남편에게 3년의 기한을 주겠다고 했지만 뜬금없는 소리로만 알아들었던 것 같다.






주말부부답게 남편은 일주에 한 번씩 가족들이 좋아하는 제철 특산물을 한가득 씩 챙겨 왔다.

남들에게 우린 더 없는 가정으로 보였다.

쓸데없는 소문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어쩌다 만나는 남편과는 다툴 일도 없었다.

예전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지 남편은 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그 도시에서 가장 핫 하다는 대형 아파트도 분양받았다.

붙박이 냉장고와 드럼세탁기, 대리석 식탁과 정수기, 두 개의 주방과 화장실, 강화 마루에 붙박이 옷장과 화장대 등 처음 이 도시로 와서 매입했던 아파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풀 옵션을 갖춘 아파트였다.


환경이 변하고 아이들이 점차 커가니 남편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지만, 문제는 내게 일어났다.

모든 건 제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고 있는데 막상 자리를 못 잡는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이 의외였다.


처음엔 직장과 지역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아이들도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자리를 잡아 다니는데 왜 난 가슴에 펑크가 난 것처럼 허전하기만 할까!

지리를 모르니 시간이 나는 주말이면 제일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기를 되풀이했다.

오늘은 19번, 내일은 21번.


푸른빛을 내던 차창 밖의 나무들은 어느새 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고, 뒹구는 낙엽처럼 내 마음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지난날 잘못을 만회라도 하듯 남편은 분에 넘칠 만큼 잘하고 있었고 무한정 베풀었지만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11월의 이른 해넘이로 하나, 둘씩 네온사인이 켜지고, 옷깃을 여미며 바쁘게 걷는 사람들을 보면 낯선 도시에 낯선 이방인으로 뚝 떨어진 거 같아 눈물이 났다.

아이들 앞에서, 친정부모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차 안에서 한참을 머문 후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허다했다.


난 강한 줄 알았는데, 뱀처럼 차가운 줄 알았는데, 40을 코 앞에 둔 나이 탓인지 아니면 갱년기가 시작되었는지 가슴이 시리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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