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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장례, 첫날

by 블랙홀

아줌마들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드라마라고 했다.

어느 집은 리모컨 전쟁을 하다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고 하고, 어느 집은 싸우다 지쳐 안방과 거실에 따로 TV를 설치해서 각자 프로그램을 시청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일정시간에 방영하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그런지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동물 또는 사람), 또는 단편적인 시사프로그램을 즐겨보고 미스터리나 생과 사에 대한 방송을 한다 하면 그 시간만큼은 알람을 맞춰놓고 시청한다.


어릴 적엔 죽음이 뭔지 그저 우리 가족에게는, 내 주변에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친구나 지인, 가족 등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팔순이 넘어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후배나 동기, 친구의 부고소식을 들으면 더 충격적이었다. 며칠 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힘들어했다면, 이런 날 보고 부모님은 서운하다고 하실까???



몇 해 전 지인이 교통사고로 119 이송 중에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날은 야근으로 동료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는 순간, 병원 응급실이라며 연락이 왔다. 웬 응급실??? 왜???

그렇게 교통사고 연락을 받았을 땐 그저 경상이거나 중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망했다고 하니 온몸에 힘이 빠지고 황당스럽기만 했다.


2시간을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을 했고, 당연히 장례식장을 잡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유족인 가족이 오지 않아 식장을 잡지 못했다고 했다.


가까이에 사는 친인척 동생들도 모여 있었지만 상주가 와서 장례식장을 대여하고 서명을 할 때까지 식장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명을 한 사람은 그 장례에 관련된 모든 절차를 결정해야 하고,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한단다.

아는 지인들과 친인척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유족이 올 때까지 응급실 복도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지만 돈의 위력은 죽음 앞에서도 대단했다.


결국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유족이 도착했고 부랴부랴 호실이 배정되었다.


참, 그 이전에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이 맞는지 확인하는 게 가장 먼저였던 것 같다.

난 장례식장의 꽃 장식 제단 아래 시신을 모셔두는 줄 알았는데, 따로 영안실이라 해서 그곳에서 시신을 모셔둔다고 했다. 일정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몇 개의 철 문을 지나서야 갈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린애들이나 연로하신 어른들은 가급적 참여하지 말라고 했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를 제외하곤 마지막 모습을 보고픈 이는 보라고 했다.


영안실은 마치 전철역에 있는 사물함처럼 칸칸이 되어있었고, 그중 한 칸을 꺼내 확인을 시켜주었다.

자살이나 사고사의 경우 험한 모습은 응급실에서 처치를 하고 내려보낸다고 했다.

확인이 쉽도록 상반신을 바깥쪽으로 다리는 안쪽으로 모셔두었었다. 그리고 서랍은 칸을 끝까지 빼지 않고 상반신이 보일만큼만 보여주었는데 옷은 입히지 않았던 것 같다.


통상 사망한 이는 백지장처럼 하얗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핏기 없는 노란빛으로, 머리와 가슴 쪽으로 넓게 붕대가 감겨있었는데...... 감긴 두 눈 언저리부터 귀 밑까지는 눈물이 흘러내려 짙은 눈물 자국으로 남겨져 있었다.


어느 의사는 사망을 해도 뇌는 작동을 해서 몇 초동안 지나온 삶을 파노라마처럼 보인다고 했다.

참수당한 얼굴에서도 두 눈알은 움직이고, 머리 잘 린 뱀도 1시간 가까이 상대방은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망인도 마지막 순간임을 느끼며 지난 삶을 생각했을 테고, 흘린 눈물은 남겨진 가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1분만 아니, 몇 초의 찰나만 비껴갔으면 사고를 피했을 텐데,

태어나는 건 순서가 있어도 죽음 앞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유족은 슬픔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할 일이 많았다.

영정사진을 준비하지 못했다면(노인네가 아니라면 누가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 두겠는가) 조그만 명함사진을 확대시키고, 양복은 입지 않았어도 컴퓨터기술로 양복을 입혀 입혀주었다.

지금에야 기술이 발달해서 선명하게 나올 수 있지만 당시에는 크게 확대를 했으니 사진이 흐릿해서 이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동안은 조의를 표하고만 돌아와 자세한 건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과정을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치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만 장례식장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시댁이나 친정 조부모님은 모두 집에서 장례를 치른 터라 장례식장의 모습과 흐름은 생소하기만 했다.

언제가 떠나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장례는 떠나는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도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했으니 쉬운 게 아니었다.


특히 서명을 한 유족대표는 모든 것을 주문하고 확인해야 했다.

국화는 몇 단을 주문할지,

초제에 놓일 제사음식과 조문객에게 접대할 음식은 어떤 메뉴를 어느 정도 주문해야 할지,

향과 제단에 올릴 술은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하며 상식은 하루 몇 번 올릴지,

염습은 언제 하며 발인에 맞춰 차량은 몇 대를 준비해야 할지,

모두를 결정해야 하니 슬프다고 울기만 할 수 없었다.


장례식장은 장례만 치러주는 게 아니라 시신안치에서 수의, 유골함과 화장터 예약은 물론 장지까지 동행해 주었다. 장지에서 초제(첫 번째 제사까지 지내주는 걸로 마무리했다.)


큰일이 생길 때 정황이 없을 것을 대비해서 상조회사가 여러 곳 생겼지만, 실제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결국 유족이 해야 했다. 담당 장례지도사가 따라다니며 모두 알려주니 유족은 예상 비용에 맞춰 결정을 하면 되었다.


화장은 법으로 사망진단을 받은 후 최소 24시간이 지나야 할 수 있다고 했다.

통상 오일장 또는 삼일 장 또는 일 일장으로 한다고 했다.

특별한 사정이 아니라면 보통 삼일장을 치렀다.

사망당일, 그리고 다음 날, 삼일째 되는 날은 발인을 해야 했다.

밤늦게 식장을 배당받는 바람에 1일 차는 몇 시간 되지 않아 금방 지나갔다.


자살이나 사고사, 급사의 경우는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기 위해 의무적으로 국과수에서 부검을 해야 한다고 하나, 유서도 있고 현장에서의 상황으로 자살이 분명하다면 유족의 의견을 반영해 부검은 건너뛸 수도 있다고 했다.


2일 차엔 부검을 한 후 입관을 한다고 했다.

부검엔 경찰관 1명과 가족 또는 친인척이 참여한다고 했지만 해부를 하다시피 하고 다시 봉합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니, 험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해서 경찰관만 혼자서만 다녀왔다.


하긴 갑작스럼 죽음에 대한 충격과 밤늦게 장례식장을 배정받고 물건을 주문하고 조문객을 맞이해야 했으니 아침 7시경 경 부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을게다.

더구나 국과수는 다른 지역에 있으니 출발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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