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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장례, 둘째

by 블랙홀

12월 말, 장례식장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썰렁하지 못해 적막감까지 들었다.

가까이에 사는 일가친척이나 망인의 친구들이 함께 밤을 새운다고 했다.


하지만 새벽 서 너 시가 되니 근처 사는 이 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처럼 장거리인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호상이 아닌 악상에 사고사였지만 조문객 중에는 돌아가지 않고 웃고 떠들며 지인들과 큰 소리로 잡담하는 걸 보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찾아오는 이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발길이 끊어진다는 말처럼. 망인의 친구들은 조문 후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유족 중 대학생 아이의 친구들은 낮에는 여러 명이 돌아가며 심부름을 했고, 밤에는 2인 1조가 되어 발인을 할 때까지 함께 했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경사보다는 조사 때 알 수 있다는데 맞는 말이었다.


연로하거나 어린 친구들은 제단 옆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제단 주변에서 잤다.

향이 꺼지면 안 된다고 해서 30분~ 1 시간씩 쪽잠을 자면서 향이 켜졌는지 확인하느라 서로 밤잠을 설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단을 보고 자려니 영정사진과 자꾸만 눈이 마주쳐져 제단 쪽으로 머리를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잤다.

새벽녘에는 조문객이 없어 잠시들 눈을 붙였나 보다.

일행 중 한 명이 화들짝 놀라며 깨웠다.


제단 양쪽에 놓여있는 촛불이 모두 꺼져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니 향이라면 금방 타버리니 꺼져도 그리 이상할리 없지만 멀쩡한 촛불이 꺼져 버렸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때 머리가 쭈빗서며 소름이 돋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30분쯤, 시신이 부검에 들어간다고 출발한 지 한참이 되었으니 예정대로라면 부검에 들어갔을 시간이었다.ㅠ


장례식장은 지하층에 있었고,

출입문은 따로 문짝이 없었지만 두꺼운 자바라로 입구를 닫아놓았고,

바람이 불어올 릴도 없는데 반절도 안 탄 멀쩡한 초가 꺼져있으니... 상주는 다시 촛불을 밝혔고, 웅성거림에 밖에서 자던 이들은 모두 잠에서 깨었다.


아침 일찍 둘른 장례지도사에 촛불얘기를 하니 자신이 근무한 지 오래되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단다.

잘 못 본거 아니냐며 오히려 본인이 더 이상하단다.


당일 오후 부검을 끝내고 돌아오고 입관을 한다고 해서 입관실로 이동했다.

이때 종교가 있는 사람은 신부님이나 스님 등을 불러 함께 입관실로 갔다.

조금 기다리니 바퀴 달린 철제 이동침대(?)에 옅은 화장을 한 망인이 수의를 입고, 지도사와 함께 들어왔다.


장례지도사는 시신 주변에 빙 둘러서 있는 유족에게 망인의 귀를 막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한마디씩 하라고 했다.

누구는 걱정 말고 편한 곳으로 가서 편히 쉬라고 했고,

누구는 그동안 함께 해서 행복했다고 했고,

누구는 우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장례지도사는 쌀을 한 움큼 망인의 입속에 넣고 귀는 솜으로 막았다.

쌀은 배곯지 말라고 넣는 것이며, 귀를 막는 것은 이후의 모든 외부 소리를 듣지 말고 편안하게 가라는 뜻이란다.


수의를 입은 망인의 몸을 삼베끈으로 일곱 마디를 담담히 동여 맺지만 매듭은 짓지 않고 돌려서 끼워 넣는 식으로 했다. 이 의식을 염 또는 염습이라고 했다.


일곱 마디로 싸놓은 몸은 마치 볼링핀과 같았다.

유족들은 삼베끈 사이마다 노잣돈으로 쓰라고 돈을 끼워 넣었고, 이 돈은 입관 후 수고해 준 장례지도사가 수고비조로 챙긴다고 했다.


이후 한편에 놓여있던 하얀 종이꽃으로 장식된 관에 망자를 안치하는 것으로 입관식은 끝났다. 장례식장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망인이 남자일 경우에는 하얀 꽃으로, 여자인 경우는 생화와 조화로 관을 미리 꾸민 후 염이 끝나 망인을 관에 안치했다. 이를 입관식이라고 했다.


그때 궁금증이 생겼다.

입관 전에는 냉동 칸에 시신을 보관해 훼손을 최소한으로 막았지만, 입관 후 발인까지 하루동안 관을 어디에 어떻게 모셔두는지... 관을 통째로 냉동실에 넣지는 못할 텐데...


친정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시고, 시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장은 집에서 치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가는 것쯤으로 치부하던 때였다.

집 안방에 시신을 모셔두고 병풍으로 가려놓았었다.


아들들은 대청에서 조문객을 맞이했고, 며느리들은 낮에는 조문객을 접대했고, 밤에는 다섯 명의 며느리가 병풍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 잤다.

시신을 모신 방은 비워놓는 게 아니라고 해서 돌아가며 안방을 지켰었다.


시신 훼손을 막기 위해 드라이아이스를 채웠고 방문을 열어두었지만 향냄새와 드라이아이스 특유의 냄새, 그리고 시신에서 풍기는 냄새가 어우러져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었다.

5남 2녀로 그에 맞게 며느리와 사위까지 함께 했으니 염습을 할 때, 난 뒤로 처져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다만 동서들 뒤를 졸 졸 따라다닌 것과, 두 분 다 겨울에 돌아가셔서 여러 벌의 옷을 상복 속에 입고 있었어도 추웠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장례의 공통점이라면 지관이든 장례지도사 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입관을 하고 발인을 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장례식장의 과정은 틀에 잘 짜인 학습과도 같았다.

특히 장례식장의 장례지도사는 노련한 선생님처럼 안내를 해줘 정신없는 유족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참으로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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