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차, 발인은 오전 일찍 시작되었다. 화장장을 첫 번째 타임으로 예약하는 바람에 겨울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예약해 놓은 화장시간에 맞춰야 했으니, 비가 많이 온다거나 눈이 와서 길이 빙판 졌으면 그에 맞게 움직여야 했다.
화장장은 지역마다 있는 게 아니라서(당시 우리 지역에는 두 곳밖에 없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만큼 일찍 서둘러야 했다.
발인 전, 식장을 잡을 때 서명했던 유족대표는 그동안 주문한 음식과 술, 꽃, 향, 초 등 자잘한 것부터 장례식장 비용과 도우미 여사님의 수고비, 유골함과 수의비용 등 크고 작은 비용을 운구가 출발하기 전까지 모두 계산해야 했으니 옆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려웠던 것 같다.
망인을 모실 차는 캐딜락리무진이었고, 그 안에는 앞에 영정사진과 위패를 안은 상주가, 뒤에는 직계 가족이 탔고, 그 뒤에는 천으로 가려진 관이 함께 놓였다.
남은 가족이나 친인척은 화장장 참석인원에 따라 42인승 대형버스, 24 좌석 정도의 중형버스나 봉고차 등을 준비해 움직였다.
화장장 사무실에서 수속을 하고 화장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면 그 순번에 따라 화장순서가 정해졌다. 화장장은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화장 접수를 해서 그날그날의 기를 소화시킨다고 했다.
화장을 하려면 사망진단서가 있어야 가능하다.
사망진단서는 사망한 병원의 의사가 발행해 준다.
장례지도사는 사망진단서를 넉넉히 10장 이상 정도를 떼는 게 좋다고 했다.
화장터에도 제출해야 하고, 장지에 가서도 제출해야 하고 그 외 보험이나 상속 등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용할 곳이 많다고 했다.
차에서 내린 관은 장례식장에서 인도받아 화장을 시킬 수 있는 장소로 모셔가고, 유족들은 정해진 관망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관망실이 여러 곳이면 여러 기의 화장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고, 관망실이 적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관망실은 유족과 관을 사이에 두고 투명하고 두꺼운 특수요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고, 망인의 관임을 유족에게 확인시킨 후 레일을 타고 안쪽 화장장 안쪽 불길 속으로 들어가면 유족은 끝날 때까지 관망실에 기다려야 했다.
관이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유족은 망인을 향해 "000 불 들어가요~~~ "라고 소리를 지르라고 했다.
아무 말하지 않으면 관속의 망인이 불길이 닿는 순간 놀란다는 이유라고 했다.
그 발상은 어디서부터 인지는 몰라도 사찰에서도 고승이 사망하면,절 마당에 장작을 쌓은 후 망인을 눕히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순간 제자스님들이 "스님! 불 들어가요~~~"라며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이때까지 망인을 사자가 아닌 산 사람 대하듯 하는 것은 전통에서 유래된 게 아닌가 싶다.
유족들은 화장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유골을 인도받는다.
화장시간은 통상 1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화장이 끝난 후에도 다시 한번 유골을 확인 후 유골함에 넣어 유족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그 유골을 모시고 가서 강에서 뿌리던가,
수목장을 하던가,
매립을 하던가,
납골당으로 모실 것으로 할지는 유족의 선택이다.
화장을 치르고 나니 이른 12월 해는 벌써 지기 시작해서 어두웠다.
망인은 생전에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유족이 불교신자라서 사찰에 모신다고 했다.
주지스님은 입관할 때도 와서 좋은 곳으로 미련두지 말고 가라고 빌어 주었기에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사찰에 따라서는 납골당을 직접 운영하는 곳도 있었고, 납골당까지는 아니라도 신자라면 일부 한 공간을 내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유족들이 찾아간 곳은 조계종이었고, 비구니스님들만 있던 곳으로 주지스님은 본사에서 4년에 한 번씩 임명을 한다니 그 계율도 엄격했다.
장례식장에서 주지스님에게 법당에 안치하는 것을 허락받고, 화장장에서 곧바로 다니던 절로 갔지만, 유골함을 보신 큰 스님은 법당 안에 유골을 들일 수 없다고 펄쩍 뛰며 노기가 등등했다. 그렇다고 집으로 모실 수도 없고,.
주지스님은 약속한 게 있어서인지 큰 스님 몰래 법당 큰 부처님 제단 아래에 유골함을 모셔두었다.
큰 스님만 빼고 주지스님이하 공양주보살님까지 모두 쉬쉬 했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모실 수 없으니 적당한 자리가 나오면 다시 옮기기로 하고 일단은 법당 안에 모셔 두었던 것이다.
비록 3일장이었지만 마치 3개월이 흐른 듯했고, 지난날을 삶이 3일 만에 흔적을 지운다니 허망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