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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야 나 설 수 있는 병원문은 너무 높아

by 블랙홀

부모님은 정반대의 성격에 생활습관도 정반대였다.


엄마는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며, 조금 아픈 것도 참지 못했고 팔랑귀였다.

내가 팔랑귀인 건 엄마를 그대로 닮아서이다.


80kg이 넘는 체중을 유지하느라 그런지 항상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고, 누군가에게 무릎인공관절 수술을 받으니 날아갈 것 같다는 얘기에 혹 해서, 혼자 e대병원에 수술을 예약하고 내게 통고했다.

다리수술 예약했으니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랬다.


엄마는 자식은 부모를 공양하고 효도하며 노후를 해결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옛날 분이셨다.

한꺼번에 양쪽 수술을 했고 나이가 육십이 넘으니 그만큼 회복속도도 느렸다.

병원에서는 수술 후 재활은 집 근처의 병원에서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수술만 하면 모두 해결되는 줄 알았나 보다.


수술 후 아프다는 이유로 운동이나 재활을 안 해 수술한 다리는 뻗다리가 되어 넘어지면 혼자 일어나지 못했고, 좌식생활은 할 수 없어 집안의 집기는 모두 입식생활로 바꾸어졌다.

수술을 하기 전보다 어쩌면 몸 상태는 더 안 좋아진 것이다.


이후 집안 청소며 빨래, 밥은 아버지가 했고, 엄마는 그저 반찬을 만드는 정도였지만 항상 아버지가 해 놓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로 홀쭉한 몸이 더 말라져 가서 60kg를 넘나들었지만, 엄마는 나날이 몸이 비대해졌다.


그날도 엄마는 아버지가 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며 베란다 물청소를 하다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응급실로 실려가 수술을 했지만 나이가 있는 만큼 회복은 되지 않았고, 결국 요양병원을 전전하다 만 4년 만에 돌아가셨다.

응급실로 실려가던 그날이 집에서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대. 소변을 받아내야 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도 엄마는 시간이 흐르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평소처럼 주변사람에게 짜증 내는 빈도가 늘어났고 입맛도 까다로운 건 여전했다.


간병인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갔다.

체격이 크니 다른 사람의 배로 힘이 든다고 투덜댔고, 간병비를 더 준다고 해도 환영받지 못하는 환자였다.

나중엔 간병인들 사이에 기피대상으로 소문이 나서 간병인을 구하지 못해 난 종일 근무하고 저녁엔 병원에 가서 엄마를 간호해야 했다.


기저귀를 채웠어도 그 느낌이 싫다며 굳이 화정실로 간다 해서 두. 세 시간마다 한 번씩 동행을 해야 했으니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집에 가지 못하니 병원 근처에서 매식으로 해결해야 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하루 세끼를 인스턴트로 해결하곤 했다.


어쩌다 갈아입을 옷 때문에 집에 들러보면 싱크대엔 음식물이 말라비틀어진 그릇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반려견도 제대로 챙기지 않아 강아지인지 사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북하게 털이 자랐고, 자주 목욕을 시켜주지 않아 털은 엉겨 붙어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계시니 밥은 밥솥이 한다 해도 반찬이며, 빨래 등 모두 난리였다.

그저 편한 대로 반찬 한 가지에 물 말아 드시곤 했다.

뚜벅이에다 시장을 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은 팔십이 넘은 아버지에겐 무리였고, 난 엄마에게 매달리다 보니 자연히 아버지께는 소홀해졌다..


집에 환자가 있으면 가족들 역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피폐해진다는 말이 맞았다.


그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 후 병원으로 갔다.


몸이 고단하니 잠시 보호자용 침대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서 뜨겁고 축축한 물체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보니 엄마의 기저귀였다.

엄마는 종일 침대에 누워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 데다가, 간호한다는 딸년은 쿨 쿨 잠만 자니 부아가 났던 모양이다.


한 성격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마의 그런 모습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직장과 병원을 오가는 날이 늘어갈수록 나도 지쳐가던 때였다.

젖은 기저귀로 싸대기까지 맞았으니 기분이 묘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해도 엄마는 찝찝하다고 기저귀를 차지 않으려고 했고, 소변기에 볼일을 보는 것도 싫어했다.

두어 시간이 지났나,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휠체어를 가지러 간 사이, 그 새를 참지 않고 그대로 볼일을 보셨다.

내가 늦게 왔다고 화를 내신 것이다.


엄마의 침상 밑에 있던 기저귀 묶음이며 휴지, 내 목욕바구니, 그리고 옷가지는 모두 젖었고, 바닥도 흥건히 젖어있었다.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뚜껑이 열렸고, 뭐라 대꾸할 수도 없으니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집에 간 후 간호사들이 말려도 밀대에 의지해서 혼자 화장실에 가다가 또 넘어졌다는 것이다. oh my god

엄마의 상태는 더 나빠졌고, 담당의사는 이후에는 회복해서 걷기는 힘들다는 얘기를 했다. 어뜩해~~

병원에서는 더 해줄 게 없고, 의료보험상 일정기간이상은 입원할 수 없다며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병원은 환자가 세월아 네월아 하며 병원에 입원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이동해서 입원했고, 난 간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요양병원에서는 일 년 남짓 계셨지만 간병인들이 뒤처리를 늦게 해 준다든가, 대답을 안 한다고 욕을 하고 물병 등을 집어던지는 통에 다른 요양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며 무언의 압박으로 강제 퇴원을 당하게 되었다.


두 번째 요양병원으로 옮기고서야 엄마는 걸어서는 병원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세등등하던 모습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으며 삶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문병을 갈 때마다 이렇게 산송장으로 살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죽게 해 달라며 울기만 했다.

간병인 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병원의 간병인은 조선족에서 몽골족으로 바뀌었고, 한국어에도 서툴러 말도 통하지 않았다.


병원시설은 좋았지만 서비스는 바닥이었다. 엄마의 말은 그저 치매노인의 푸념으로 치부하며 묵살했고 욕창도 생겨 심각했다.

밥도 먹여줘야 먹고 물 한 모금도 누가 떠다 줘야 했으며, 기저귀도 갈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생활의 끝이 죽음이라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돌아눕지도 못했고, 한번 자세를 해주면 종일 그대로 계셨지만 간병인을 탓하지 않았고 그저 당신의 신세가 그렇게 되었음을 자책하셨다.


가끔씩 엄마를 따르던 반려견 쭈쭈가 보고 싶다며 눈물지었고, 한 번만 쭈쭈를 볼 수 있게 달라고 애원하셨지만 난 동영상으로 밖에 보여줄 수 없었다.

혼자 아파트에 계시던 아버지는 버스를 여러 번 타고 엄마를 보러 오기가 힘들어 우리 집을 거주를 옮겼고,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며 엄마의 상태를 지켜봤다.

엄마가 아파하거나 간병인과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자주 병원 측에 항의를 했지만, 병원에선 아버지는 따지기 좋아하는 고집 센 노인정도로 봤는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간병인 구하기도 힘든데 아버지 때문에 간병인이 그만두겠다고 하니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좋겠다는 식으로.


그때마다 난 아버지께 그 상황을 얘기하며 그만하시라고 설득했다.

엄마는 눈을 뜨면 고통을 호소했고, 한쪽 다리는 움츠러든째 아예 굳어져 펴지지도 않았으며, 욕창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해졌다.


마지막으로 난 의사에게 부탁했다.

살아있는 동안 엄마의 고통을 줄여 달라고... 진통제와 수면유도제를 놔달라고.

아버지는 내가 설득할 테니 대신 욕창은 꼭 신경 써달라고 했다.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지내야 한다면 차라리 그 방법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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