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떠난 엄마

by 블랙홀

12월 초가 되었다.

눈발이 흩날렸지만 아버지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30여분을 걸어, 엄마가 계신 병원으로 출. 퇴근하셨다.


엄마의 82세 생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니....... 요양병원 생활이 벌써 만 4년이 되었나 보다.

엄마는 응급실을 통해 수술을 하신 후, 병원을 떠 도느라 집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으로 가지 못해 당신의 패물이 어디에 있고, 당신의 비자금이 어디에 있고, 당신이 옷 장 어디에 굴러다니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며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어려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처음 요양병원으로 가셨을 때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다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일주일에 한 번, 그다음은 이주일에 한 번을 다니다가 자영업을 한다고 떨어져 나오니 이제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다.


이번 달엔 엄마의 생신이 끼어 갈 날이 지났지만, 생신일에 맞추려고 한 달을 훌쩍 넘겨버렸나 보다.

그때 난 본가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서 자영업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좋아하시는 밑반찬을 만들어 가려고 시장을 봐서 현관에 들어서는데 전화가 왔다. 차분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얼른 올라오라고.


언제 가는 가실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전해 듣고 보니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해온 예상치 못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몇 가지 옷가지만 챙기고 운전대를 잡았다.

손이 떨려 운전을 못 할 것 같았는데, 병원에 다다를수록 더 침착해졌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산 송장처럼 지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수면제를 구해다 달라'라고 조르던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떠 올랐다.


죽음은 슬프지만 어쩌면 희망 없이 고통 속에 사는 것보다, 죽음은 엄마에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으니, 난 비정한 딸 인가???


내가 도착할 때까지 엄마는 요양병원의 '창조방'이라는 곳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을 못 봐서 그런지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누런 빛을 띠고 있었고, 마치 잠을 자듯 평온해 보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잔다고 생각하고 깨우지 않았는데, 너무 오래 자는 것 같아 깨워보니, 이미 돌아가셨다고 했다.


환자복으로 감쌌지만 앙상한 몸은 그대로 보였고, 근육이 빠진 다리는 살가죽만 남아있었다. 욕창으로 옆으로만 누웠었는데 돌아가셔서야 바로 누울 수 있었지만 ㄱ자로 굽어진 한쪽 다리는 그대로 인 것이 슬펐다.

저 다리로 엄마는 저승 먼 길을 가실 수 있을까?


요양병원에서 장례식장을 연계해 줬고 장례식장의 차가 와서 우리 모두를 태우고 갔다.

제단이 꾸며졌고, 엄마의 영정사진은 수줍은 듯 웃고 있는 40대 초반 그때의 모습이었다.


친인척들은 아버지와 나를 위로했다.

82세까지 살았으니 그래도 호상이라고.

그렇게 사는 것보다 어쩌면 떠나신 게 엄마에게는 오히려 나았을 거라고.

그리고 85세인 아버지를 더 걱정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상주로 할 일은 많았다.

손님을 위한 음식을 주문하고, 수의도 고르고, 유골함도 결정하고 서명도 해야 했다.


엄마는 살아생전 내게 부탁하신 것이 있었다.

나 죽거든 신부님과 스님을 모셔 당신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리고 천도재는 절에서 지내달라고.


사실 엄마는 죽는 게 무섭다고 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가서 어떤 생활을 할지도 모르고,

누구를 만날지도 모르고...

그래서 무섭고 두렵다고.


신부님이 오셨고, 신부님이 가신 뒤엔 스님이 오셨다.

같은 층의 다른 식장에선 의아해했다.

같은 장소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기도를 드리고, 그다음은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했으니... 저 집의 종교는 도대체 뭐냐고... 하지만 그건 엄마의 유언이었다.


밤이면 아버지는 인근 우리 집으로 가셨고,

친인척은 늦은 시간에 왔다가 같이 온 사촌들과 함께 귀가하고, 당일치기를 못할 어른들은 제단 옆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누군가는 제단을 지켜야 했고, 향이 꺼지는지 촛불이 꺼지는지 확인을 해야 했으니 난 제단 앞에서 혼자 밤을 새기로 했다.


자식이 있어도 엄마랑 같이 할머니의 제단 앞에서 함께 있자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넓은 장례식장 안에 혼자 덩그머니 남아있자니 불효스럽게도 왠지 주변을 자꾸만 둘러본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른다.

엄마 생전에 열아들 부럽지 않게 딸 하나 잘 키우겠다고 하신 것처럼, 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들지 못하다가 새벽녘,

잠시 선 잠이 들었나 싶었을 때. 엄마가 찾아왔고, 찾아온 장소는 내가 누워있는 장례식장이었다. 모습은 안보였지만 주변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엄마는 혼자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에 사망했다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오빠와 함께 왔다. 이제야 오빠를 만났다면서 함께 가신다는 것이었다.


화들짝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다.


난 눈물이 쏟아졌다.


백일기침으로 다섯 살 오빠가 떠날 때까지, 돈이 없어 병원 한 번 못 가보고 자식을 보냈다는 죄책감은 한평생 엄마를 힘들게 했다.

난 아버지의 무능력을 탓하며 원망했던 것은 미움으로 변했고, 엄마가 공격할 때마다 아버지는 죄인처럼 아무 말씀도 못하고 건너 방으로 도망가셨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오빠를 만나 함께 지내겠다니 이제 엄마가 혼자가 아님에 안도했고, 그 긴 시간을 엄마를 기다렸을 오빠에게 미안했고, 모자가 함께 있음에 안도의 눈물이 나왔다. 바보스럽게.

그저 꿈을 꾼 것뿐인데......


입관식 때,

수의를 입고 나타난 엄마의 굽은 다리는 여전히 솟아 나와 있었다.

장례지도사는 억지로 펼 경우 뼈가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지만, 내 눈엔 돌아가실 때의 그 상태 그대로였다.

단지 관 뚜껑이 닫아지지 않을까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발인 날

12월 중순이었던 그날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고, 너무도 추웠다.

장례식장을 떠나는 운구차는 빙판진 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시속 30킬로로 기어 화장장에 도착했다.


엄마의 시신이 화장장 불구덩이로 들어갈 때 나는 밖에서 목청껏 외쳤다.

"엄마~~ 불 들어가요~~" 하고.

엄마는 더위를 많이 탔는데 갑자기 불구덩이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놀랠까 하고.


화장이 끝나고 엄마의 유골을 확인했을 때, 무릎인공관절 수술 시 박아 놓은 철판은 분홍색으로 달구어진 채 남아있었다.

유골함을 받고, 납골당으로 향할 때까지 엄마의 온기처럼 유골함은 너무도 따스했다.


달나라 아니 화성에 까지 로켓을 쏘아 올리고, 로봇이 인간 대신 일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때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 종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엄마를 그렇게 모시고 나서 난 보건소에 가서 연명치료거부서를 발급받았다.

엄마처럼 고통 속에, 정말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그런 상황이 된다면 차라리 치료를 거부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호스피스 병동도 거절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암 말기처럼 치료로 연장할 수 없을 때만 연명치료 거부가 가능하고, 신체적인 치료로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움직일 수 있을 때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니 참으로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 가끔씩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어? 이건 엄마가 행동이었는데 이제 내가 하고 있네......

이제야 나는 엄마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고, 엄마에 대한 행동을 공유할 수 있게 된 물리학적 환경에 서 있다는 것이 자꾸만 서글퍼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어서야 나 설 수 있는 병원문은 너무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