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고, 찬물을 마시고 이쑤시개를 쓸 만큼 허세도 있었지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사춘기 때는 그런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었다.
전세방을 전전하다 보니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이라는 생각에 미워도 했었다.
하지만 내 나이가 들어가니 자식이나 주변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삶을 보고 눈물이 나게 존경스럽기만 했다.
노부부는 한 사람이 사망하면 남은 한 명은 일, 이년을 못 넘긴다는 말이 있었다.
매일 엄마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출근하던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엄마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민도 늘어갔다.
객지에서 하던 일을 접으려 해도 쉽사리 매각이나 임대도 나가지 않아 어쩔 수없이 떨어져 있으니 자식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위층에 살던 막내만 외출할 때마다 아래층 할아버지를 둘러봤고, 자잘한 심부름을 한다고 했지만... 안부를 물어보면 머뭇거리곤 해서 그도 신경이 쓰였다.
동사무소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 얘기를 했더니 이미 독거노인이라 해서 동사무소에서 담당 공무원이 배치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 차 찾아간다고 했다.
지자체에서 나오는 무료 반찬을 처음 몇 번은 받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으니 오지 말라고 해서 간간이 전화만 한다고도 했다.
가족에게는 쉽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 담당공무원을 통해 아버지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식과 달리 타인은 안 보면 그만이니 속 얘기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12월에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해 여름, 느닷없이 시에서 지원해 주는 무료공동주택으로 나가시겠다고 했다.
노숙자나 독거노인을 위해 지원해 준다는 그곳은 쪽방처럼 시설이 열악한 곳인데, 갑자기 나가시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586세대가 대부분 그랬듯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임용되던 22살 때부터 월급을 타면 생활비를 제외하고 모두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첫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흔쾌히 봐주신다고 해서 양육비를 보내드렸었고, 아이들이 커서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연로하시고 따로 수입처가 없어 자연스럽게 그 생활은 그때까지 이어졌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 신 후엔 병원비와 따로 아버지의 생활비를 챙기다 보니 내 한 달 봉급은 그대로 들어갔다.
그때 아버지는 24평 아파트에 엄마 없이 덩그머니 혼자 있으면서 생활비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엄마의 담당의가 회복불능이란 말에 아파트를 처분하고, 요양병원 인근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언제일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엄마를 자주 찾아보고 아파트처분 비용으로는 병원비를 대겠다며.
당시엔 나도 퇴직을 하고 타지에서 장사를 시작했지만, 장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인 데다 적응을 하지 못해 툭하면 손님들과 싸웠고, 100원을 벌면 500원을 쓰다 보니 갖고 있던 자본금마저 까먹고 있던 때라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따로 독립하시겠다는 아버지를 빌어 올리다시피 해서 우리 집으로 모셨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이듬해 여름, 갑자기 따로 나가시겠다고 했다. 시에서 지원해 주는 독거노인을 위한 시설이니 방 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그럼 나도 아버지가 계시던 방을 세를 놓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었다.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갑자기 우리 집을 떠나려 하셨는지.
간신히 아버지를 붙잡는 그 사달이 생긴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밤중에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어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응급실 의사에게 처음 들었다.
위암말기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으며, 이미 뼈까지 암이 전이되어 그 통증으로 정신을 잃었다며.
연세가 있어 수술도 할 수 없으니 모르핀 주사와 약으로 처치해 주고 며칠 입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집으로 가시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하시려던 그때 처음 암인걸 아시고, 자식에게 누를 끼칠까 봐 나가시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 집엔 암 병력을 가진 윗 분들이 없어 암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퇴원하셨지만 마음이 안 놓여 막내보고 할아버지 방에서 지내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막내는 복용하시던 모르핀과 약을 발견했고, 그동안 혼자 지내던 아버지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암이 말기가 되고 전이가 될 때까지 눈치한 번 채지 못했으니 나는 불효자식 인 셈이다.
그때부터 막내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는데, 가장 힘들었다는 건 느닷없는 돌발행동이었단다.
갑자기 친구(예전 돌아가신 친구)가 찾아왔다고 맨발로 허겁지겁 나가고...
밖에 누가 왔다면서 벌떡 일어나 속옷차림으로 나가고...
병원 의사에게 물어보니 사람이 사망하기 직 전에 일어나는 행동으로 '섬망' 현상이라고 했다.
'섬망'은 옛날 겪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시. 공간을 초월한 행동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간간이 정신이 돌아오면 막내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며 내가 죽으면 수의 대신 입던 양복을 입혀달라고, 그리고 꼭 1일장으로 하라고... 마지막 부탁을 하시곤 했단다.
세 번째 의식을 잃어 응급실로 입원했을 때는 중환자실로 옮길 만큼 급박했었다.
병원에서는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았고, 나는 곧바로 출발했다.
중환자실로 가니, 아버지는 중앙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계셨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두 눈은 안대를 씌어 놓았고(눈이 안 감겨서), 호흡기를 매단 채 손가락, 발가락에 주렁주렁 패치가 붙어 있었다.
의식은 전혀 없었고 옆에 있는 모니터의 그래프가 파동을 치는 걸 보고서야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왔고, 지금도 의식은 없지만 심장충격기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85세의 고령에다 몸이 약해 잘 못하면 뼈가 부러질지 몰라 의사는 편히 보내드리는 게 났다고도 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옆의 모니터는 삑삑 소리를 내며 수직하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0에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아!!! 나를 만나려고 그렇게 버티셨나 보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경이었다.
나는 울어가며 아버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솜이 아버지의 귀를 막기까지 주문을 하듯.
아버지,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미련한 딸이라서 죄송합니다.
그저 춥지 않고, 어둡지도 않고, 배고프지 않은 곳에 가셔서 엄마랑 오빠를 만나 평안하게 지내시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