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한겨울에 가면 엄마 때처럼 자식들이 고생한다며, 당신은 볕 좋은 가을에 가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만 4년을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던 엄마가 가신 후, 빈 집에서 혼자 지내셨다.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촉수 낮은 불빛 아래서 어둡게 지내셨고,
가스비가 나온다고 한 겨울에는 이불속에서 사셨다.
입맛 없다고 맨밥을 죽으로 만들어 드시곤 했다.
암 말기가 되도록 자식들은 몰랐다.
뼈까지 전이되어 이겨낼 수 없는 고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가신 날에야 알게 되었다.
자식들이 뒷바라지로 힘들까 봐 진통제로 버티신 것이다.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딸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깎아드린지 삼일째 되던 날 그렇게 가셨다.
아버지는 장례 지내기 좋은 가을에 떠나시겠다던 생전 말씀처럼 화창한 10월에 떠나신 것이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 4촌 이내 친척에게만 연락했고,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최소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아버지는 내게 전해야 할 말들은 막내손주에게 하고 가셨다.
* 3일 장이 아닌 1일장을 지내라.
* 수의대신 평소 입었던 양복을 입혀달라.
* 할아버지 사망 뒤, 주머니가 있는 옷장 속의 옷들은 꼭 확인해 봐라.
* 할아버지 방에 있던 책칼피 중에 네게 쓴 편지가 있으니 읽어봐라. 였다.
우리나라 법은 24시간이 지나야 화장을 할 수 있다고 해서, 1일 장이라고 해도 장례식장은 하루를 잡았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들은 얘기로는 간혹 사망 후에 일어날 불 상사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종합병원의 영안실은 직접 들어간 적이 있지만, 장례식장에서는 본 적이 없다.
시신 훼손을 막기 위해 냉동실에 보관할 테고, 그다음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과연 제 자리로 돌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사흘이 아닌 하루에 몰아서 하려니 더 바빴다.
하루든 사흘이든 하는 의식은 같았기 때문이다.
모신 첫날 저녁에 입관식을 하기로 했다.
입관식 때 아버지가 입을 옷을 챙기러 간 막내가 입관식을 할 시간이 다가와도 오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전화를 해보니 챙길 게 많아 그렇다고 했다.
입관식 가까이가 되어서야 막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보따리를 챙겨 왔다.
안경,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벨트, 중절모, 양말, 구두, 틀니에 지팡이까지.
돌아가실 즈음 많이 편찮으셨고 그러다 보니 챙길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깨끗한 옷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입관실로 들어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틀니를 끼지 않아 양볼은 홀쭉했고, 화장은 촌스럽게 너무 진한 데다 창백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분홍색 샤도우로 촌스럽게 한 볼터치까지...
평소 입었던 옷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크고 헐렁했다.
새 옷도 아니고 새 구두도 아니었다.
막내는 세탁이 된 것 중에서 그나마 깔맞춤으로 챙겨 왔다지만... 발목이 늘어난 낡은 양말을 보니 짠 하기만 했다.
엄마처럼 양볼이 꺼진 입에 쌀 한 움큼을 채웠고, 수의가 양복이라서 그대로 꽃상여에 안치되었다. 다만 저승길에 쓸 노잣돈은 삼베매듭에 끼워놓을 데가 없어 양복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에 하루는 너무 짧았고 할 일도 많았다.
다음날, 오전 11시쯤 엄마를 태웠던 그 캐딜락 리무진에 아버지를 모시고 화장터를 향해 출발했다. 영정사진과 위패는 막내가 들었다.
가을 하늘이 너무나 새파랗고, 도로변의 코스모스와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아버지는 추운 날 자식들이 고생할까 봐 가을에 떠나겠다고 말씀하시더니만... 아버지의 소원처럼 그렇게 가셨다.
아버지는 화장 후 엄마와 같은 납골당 바로 옆에 모셨다.
아버지가 막내에게 남긴 책갈피 속의 편지에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떠나 인간적인 고 마음이 가득 담긴 내용이었단다.
자식보다 곁에서 더 챙겨주고 수고해 준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고스란히 글로 남겼으며,
아버지의 옷장에 있던 주머니에는 할아버지의 마음이라며 약간의 돈을 남기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막내에게 남긴 것은 할아버지와의 비밀이니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신 편지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난 편지에 대한 전체의 내용을 묻지 않았고, 얼마를 남겼는지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알고 보니 아버지에게 '섬망'이 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침대에 볼일을 봤고 막내는 아무런 말 없이 그 뒤처리를 했다고 했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셨단다.
맨 발로 한 밤 중에 현관 밖으로 내달릴 때도 막내는 잠결에 그런 할아버지를 잡느라 실랑이를 했고, 할아버지는 정신이 돌아오면 그런 일들을 기억하고 무안해하고 속상해하셨단다.
다만 여러 달이 지나도, 막내가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는 것에 비해 씀씀이가 늘어난 것이 이상해서 다구 친 끝에 할아버지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모신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 저 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철없던 때는 아버지 한 몸 희생치 않고 꼿꼿하게 사신만큼 가족이 고생했다고 그렇게 미워하며 원망했었는데, 돌이켜 그 삶의 바닥을 들여다보니 약하셨지만 강한 분이셨고, 그 강인함에 존경스럽기만 했다.
훗날 나도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대 할 수 있을까!!!
ㅡ 아버지 ㅡ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는 산기슭으로
노을이 물들어온다.
살아생전
자식 고생시키지 않으려
가을에 떠나겠다던
그 말씀처럼
들국화 꽃 흐드러지게 핀 날
그렇게 가셨다.
산자락을 돌고 돌아 내려오는 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떨어지는 가을 낙엽이
사람 따라 날아가니
더욱 눈물이 난다.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는 길, 생각나는 글을 시로 표현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