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랙홀 Jan 16. 2024

옛날 옛날에는

예전 초등학교 때 방학이 되면 아버지는 시골 친가에 데려다줬다가 방학이 끝날 때쯤 데리러 오셨었다.


시골 할아버지 댁은 조용하고 여유로웠으며, 든든한 할아버지가 계셔서 무서울 게 없었다.

방학 때 내려오는 손녀딸을 위해 할아버지는 장 날이 되면 왕눈깔사탕이며 십리사탕을 사서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가 하루에 몇 개씩 나눠주곤 하셨다. 난 그런 할아버지가 좋았다.


한학을 하신 할아버지는 동네사람들에게 결혼 길일과 사주, 운세, 그리고 궁합 등을 봐주시곤 했다. 가끔씩 묘터를 부탁하면 사주에 맞게 뫼자리를 잡아주곤 했다.


하지만 실제 할아버지가 설계하고 지었다는 본가는 풍수의 기본 상식과는 거리가 먼 상식적이지 않은 집이었다.

배산은 집 옆에 자리 잡았고 사람이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큰 수로는 집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방문을 열면 정방향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건너편 바위 산의 엄청 큰 칼바위는 해가 뜨면 온종일 빛이 반사되어 집 쪽을 비췄다.

대문은 현관 앞이 아닌 모퉁이를 반바퀴를 돌아 후면에 있었으니 처음 오는 사람은 뒷마당이 앞마당인 줄 알고 헷갈려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집을 짓고는 칼바위 때문에 집안풍파가 많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홍역 하다 열이 치받쳐 실명한 삼촌과 발작을 일으켜 시댁에서 쫓겨났다는 고모도 모두 그 영향 때문이라고 했다.

ㄱ자나 ㄴ자형이 아닌 ㅡ자형 집이라서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안방은 더워 죽고, 끝 방은 불을 지펴도 냉골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있는 세 개의 방앞에는 긴 툇마루가 있었고, 마루 바깥에는 통유리 현관문을 만들어 더위나 추위가 곧바로 방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그나마 신경을 쓰신 건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면 유리 문의 잠금쇠가 맞지 않아 덜컹거리는 소리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잠에 깨어 마루로 나와 요강에 앉아 있다 보면 투명 유리라서 컴컴한 바깥 모습이 그대로 들어와 세 살 위 막내고모를 깨워 망을 봐달라고 했다.

싸웠다가도 그때만큼은 동지처럼 함께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귀딱지가 앉을 만큼 지켜야 할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1. 밤에 바깥에서 누가 부르거든 세 번 이름을 부른 뒤에야 대답하라고 했다. 귀신은  번까지만 부르고 대꾸가 없으면 가버리고 사람이라면 네 번, 다섯 번 부를 거라고 다.


2. 밤에 키가 큰 손님이 찾아와 방 문을 두들기면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했다.

도깨비는 대부분 서너 척 장신이라 방 문 그림자엔 전봇대처럼 크게 보인다고 했다. 


3. 밤에 혼자 바깥을 돌아다니다 감언이설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이를 만나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해 산길로 데리고 가거나 물 귀신이 물가로 데려가 밀어 넣는다고 했다.


이 세 가지는 해마다 방학이 되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지겹듣곤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해가 지면 대문 바깥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건 막내고모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가 친구들과 어울리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넷째 고모를 걱정하던 난 착한 조카였다.


가끔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그 시절 얘기를 해주면 '거짓말, 귀신이 어디 있어' 하고 되묻는다. 지금은 가로등이랑 아파트 불빛이 너무 많아 어둠을 찾아 산속으로 도망갔다며 얼버무리며 '옛날에는 정말 그랬단다.' 하면서 우겨댄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지난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를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