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일한 손 위 오빠는 다섯 살 때 백일기침을 하다 능력 없는 부모를 만나 약 한 첩 못 써보고 그렇게 보냈다고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죄책감에 살았다.
어린아이가 죽으면 부모를 두고 먼저 간 죄인이라고 시신을 마을 길로 못 나가게 하고 마을 뒷 길로 조용히 보냈으며, 애장이라고 봉분을 쓰지 못하게 해서 야산 양지바른 곳에 묻고는 봉분대신 돌을 올려놓아 표시를 해 놨다고 했다.
하지만 오빠가 묻혔던 야트막한 구릉은 세월이 흐르면서 포도밭으로 변했고, 몇 년이 더 흘러선 기찻길이 그 옆을 지나는 통에 포도밭 마저 없어져 흔적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돌아가 실 때까지 오빠를 생각하며 눈물짓곤 하셨다.
젊었을 때는 힘들고 어려울 일이 생길 때마다 그리워했고, 나이가 드시고는 살아있었다면 의지가 되었을 텐데 하며.
난 오빠가 죽고 5년이 지나던 해 태어났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 얼굴조차 모르니 자라면서는 기억할 수 없음이 더 슬펐다.
5년 전, 열 달 간격을 두고 엄마는 만 4년 동안 계시던 요양병원에서, 아버지는 3일을 중환자 실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 후 일 년에 명절까지 일곱 번의 제사를 내 손으로 지냈다.
여자라서 나이가 어려서 차려놓은 상에 절 몇 번 하고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 보니 제대로 된 절차를 배우지 못했다.
어깨너머로 훔쳐본 것을 기억하면서 시댁과 친정을 합친 짬뽕식 제사를 지냈지만 그도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래서 난 내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이제 버겁다
시어머니가 차리던 때를 떠올리며 두 개의 교자상이 가득하도록 상을 차렸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가짓수는 줄였고, 친정아버지가 자정에 지내던 것을 떠올리며 자시(23시~01시)에 맞춰 제사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궁리 끝에 작년부터는 일 년에 한 번 하늘 문이 열려 망자들이 내려온다는 백중날 단체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온 라인에서 간단 제사상차림을 보고 나물 셋, 산적, 포, 삼색과일, 전 등은 기제사와 같이 하고, 다른 점은 밥솥을 통째로 올린 후 망자 수에 맞게 원을 그리며 숟가락을 꼽았다.
그동안은 양가 부모님들 제사만 생각했는데 작년 백중날부터는 다섯 살에 사망했다는 오빠와 자식 없이 청춘에 병사 한 큰 고모도 함께 제사에 올렸다. 이제 나도 철이 드나 보다.
자식 없이 사망한 이는 제사를 지내줄 이가 없으니 배가 고파 떠도는 원혼이 되어 살아있는 피붙이 주변을 떠돈다고 했다.
제사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지만 586세대인 난 아직도 조상을 믿고 터줏대감을 믿고 있다.
제사음식은 결국 산 사람입으로 들어간다지만 살아있는 어른들보다 돌아가신 분들이 더 많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챙기는 제사가 점 점 늘어나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사는 내 대에서만 지낼 테니 제삿날은 망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미리 선언했다.
굳이 챙기고 싶다면 일 년 한번 백중날, 살아생전 좋아하던 기호식품이나 음식을 준비하면 족하다고.
제사는 이제 586세대인 내 손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그저 가신 날을 기억하고 한 번쯤 생각해 준다면 다행이겠지.
일 년에 단 한번 하늘 문이 열려 조상에 그 조상까지 모두 내려온다니 단 하루라도 기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나는 꼰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