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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여자의 이야기(3)

계급사회

by 블랙홀

대학을 졸업 한 지 3개월 만에 운이 좋았는지 제게도 취업의 기회가 생겼어요.


시험은 어려웠지만 기본 머리가 있어서인지 커트라인에 달랑거렸지만 일단은 합격을 했으니 말이예요.


실전은 대학에서 배운 거와는 딴 판이라서 적응을 하느라 애를 먹었지만, 더 힘들었던 건 흙수저와 금수저에 대한 상사들의 노골적인 표현이었어요.

업무는 곱빼기로 최선을 다 했지만 공은 항상 금수저에게 돌아갔죠.

베라묵을 세상 같으니라고...


그때 절실히 깨달은 건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잘 둬서 금수저로 바뀔 수 없으니 그런 남편을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부모님이 주신 건 반반한 얼굴과 조금은 빨리 돌아가는 머리밖에 없으니 그저 묵묵히 주어진 생활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어요.


회식에 부르지 않아도.

사사건건 금수저와 비교를 당해도.

은따 아닌 노골적인 왕따를 당해도.

잘 자고 끼니도 잘 챙겨 먹었어요. 비록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웠어도 말이죠.


동료 금수저에겐 상사들이 그럴듯한 지위에 있는 사람과의 소개팅이 줄을 이어도 내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래도 낯 빛하나 변하지 않았어요.

난 독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멘털도 갑이라는 걸 그때 또 깨달았죠.


상사들은 그런 내가 더 뻔뻔스러웠나 봐요.

대 놓고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라고 했을 땐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네 부모님은 널 그렇게 가르쳤냐'며 애먼 부모님까지 건드릴 때는 확 받아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꾹 꾹 참았어요.

그럴 땐 ' 이미 난 성인인데 부모님이 뭘요?'라며 생글거리기까지 했으니 나중엔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더라고요.


발톱을 숨긴 매처럼 월급을 쪼개 중앙지 신문과 영자신문을 끼고 살았고, 상식을 익히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건 꿀리지 않을 인간으로 끌어올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눈여겨봤다는 지역 분이 인근에 개업의로 있는 의사와 소개팅을 시켜줬고, 처음 만난 날 우린 자정이 되도록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어요.

의사라서 한눈에 뿅갔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20대 후반에 경위로 근무하며 서울 본청으로 발탁된 경찰간부도 있었고, 작지만 지역에서 알아주는 알짜배기 사업을 하는 젊은 ceo도 있었어요. 세무서에 근무한다는 사람은 열차 앞자리에 앉았었는데 1시간 더 버스를 타야 하는 내 근무지역까지 따라와 황당하기도 했고, 내 고교 때 스승님인 총각선생님도 대학을 졸업하니 고백을 해서 놀라기도 했죠.

기회는 절실하면 오더라구요.


암튼 우린 한눈에 반해 만난 지 삼 개월이 채 지나기 전 결혼을 약속했고, 하루 한 번은 꼭 만났어요.

자정이 넘도록 얘기를 해도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항상 아쉬웠어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직장 상사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고, 심지어는 '사모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이런~ 우라질.


결혼을 준비하면서 난 그 사람이 금수저가 아닌 진짜 다이아몬드라는 걸 알았고, 신분상승을 하고 싶어 몸부림쳤지만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나고 보니 걱정스럽기까지 하더라고요. 급이 너무 달라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발을 빼기엔 상황이 너무 빨리 돌아갔고,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직장 상사들은 오히려 쌍수를 들어 결혼을 응원해 주더라고요. 응? 이게 뭔 시추에이션??

알고 보니 몰래 그를 찾아가 너무도 아끼는 능력 있는 부하직원으로 날 부추기며 밥 얻어먹고 술 얻어마시고 돌아갈 때는 두둑한 차비까지 챙겼더라고요.


그를 만나지 삼 개월이 되던 봄, 결혼을 했고 하루아침에 사모님으로 급 상승했죠.

사람 사는 거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28년을 사는 동안 몇 번의 변화가 왔었는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난 그의 신분과 동격으로 올라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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