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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여자의 이야기 (2)

치열한 삶

by 블랙홀

겨울 방학이 되기 전까지 ㅇ와 동거를 했고, 그 사이 두 번이나 중절 수술을 하면서 비로소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죠.


엄마가 될 때의 몸의 변화를 같이 지켜보며 수술을 하는 내내 ㅇ가 곁을 지켜주었지만, 자판기커피를 마시며 칼국수를 최고의 진수성찬으로 여기던 돈 없는 철부지 대학생에게 미래를 계획한다는 건 너무 앞을 나간 거였어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도 ㅇ를 만날 것인가?

실제로 ㅇ와 결혼을 할 것인가?

결론을 낼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해지며 난 서서히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어요.

둘 다 흙수저였던 우리가 그저 젊음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도 몰라요.


떡갈나무가 허물을 벗듯 잎을 떨구고, 그 잎이 바람에 뒹굴 때마다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게 가을이 깊어갈 때 난 독립을 선언하고 바로 학교 옆에 자취방을 얻어 홀로서기를 했어요.

ㅇ는 여전히 동거하던 집에서 혼자 머물렀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서는 심통을 부렸고 그런 ㅇ가 철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겼죠.



모든 교수님들이 날 망아지처럼 보지는 않았고, 그중에는 딸처럼 아껴주는 분도 있어 그분 덕에 졸업하고 초봉에 해당하는 거금(?)을 받을 수 있는 괜찮은 알바자리를 얻은 것도 그때였어요.


거리를 두는 게 딴 남친이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을 느끼던 우리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ㅇ도 날 이해해 주었지만 그의 불안감은 가끔씩 나까지 숨 막히게 했죠.

졸업을 앞두고 열정에서 이성으로, 낭만이나 쾌락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스스로 성숙해진 느낌?


마지막 겨울방학엔 본가로 돌아가 딸로 살기로 했죠.

취업을 하게 되면 부모님 곁을 떠날 테고 어쩌면 그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면 부모님과 지낼 시간은 일생 중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슬펐어요.

부모님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한 장 없었고, 그렇다 할 추억거리도 없는데 난 벌써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죠. 주민등록증은 벌써 나왔지만요.


졸업 전 날,

대학이 있는 @시로 내려가 ㅇ와 함께 지냈고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후회 없이 하얀 밤을 그대로 지새웠죠


그리고 졸업 식장에서 ㅇ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 인사를 했고 그의 부모님은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셨어요. 그것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시고.

말을 하지 않아도 ㅇ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우리 사이에 벽이 있다는 걸.


졸업식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우린 헤어졌죠. 주위 친한 친구들도 아무도 모르게요. 만날 때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헤어질 때도 요란을 떨지 않았어요.

한 번도 ㅇ에게 헤어지자는 얘기를 정식으로 한 적이 없으니 ㅇ도 그냥 물리적인 거리감으로 만남이 줄어든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때 내가 독한 여자라는 걸 처음 느꼈어요.

살다 보니 그게 내 이별 방식이더라고요.

흐르는 물처럼 만나면 이어지고, 안 보면 헤어지는.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 미래가 더 암울해졌어요.

대학추억이라고 0과 같이 지낸 거밖에 없고, 성적은 중간이니 언제 자리가 생겨 나갈지 모르는 대기상태였고, 잠시 알바를 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고 있으니 그게 더 고문 같았어요.


빠듯한 살림에 밥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밥통이 날아가고 국그릇이 공중제비를 하는 그곳이 지옥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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