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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 Klarblau Feb 15. 2024

다양성에 대하여

한 사람도 우리를 위해 있는 거야

어디서나 소수자인 우리들

이 아니라 너네들?...


많은 사람이 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카테고리화시켜버리곤 한다.

다수는 소수를 배척하기도 하고,

대략 평소에는 같이 지내다가도 급하면 따돌린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는 힘없이 밀려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소수는 다수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소수는 다수가 모르는 것을 아는데, 그 수가 비교적 혹은 매우 적다.

적어서, 그래서 희귀해서 더욱 소중하고

우리는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왜냐고?



사회가 안전하려면


인간은 안전하려고 모여 산다. 서로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더욱 가꿔나간다. 위험신호가 오면 각자 그걸 캐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발견하고 사회 구성원에게 알린다.

만일 그 신호를 발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신호를 보고도 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다면 그 사회는 파괴되는 것이다.


사회구성원 다수가 아니면 소수라고 여겨지고, 대부분 특별한 감지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소수로 여겨진다. 사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런 감지기로 사회에 위험신호를 보낼 능력이 있는 사람들!!


이들이 건전하게 잘 존재하고 필요시 사회를 보호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이 '없는' 다수와 동등하게 사회구성원이 되는 사회일수록 서로에게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것 아닐까.


우리 지금 사회는 다양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좀 이기적으로라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 싶다.


아웃사이더, 소외계층, 차별받는 사람들... 사실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에 다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수는 매우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수에게 없는 능력이 그 소수에게는 있다.



사회가 제공하는 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못하고) 소위 엉뚱한 짓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이하다고 여겨버린다. -> 그들은 졸지에 아웃사이더나 혹은 좋게 바라봐진다면 예술적(좋은 표현인가?) 기질의 소유자라가 되어버린다. 암턴 대중적이지는 않은 카테고리에 배치된다.


이들은 사회가 계속 발전하는 데에 엄연히 각각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 때문이든 관습적인 시선 때문이든. 심지어 그 능력을 사회화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죽이도록 학습하게 되기도 하다. 혹은 그러다가 결국 표현의 분출구의 방향이 뒤틀어져서 사회악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생긴다.


어느 정도로 사회화되어야 사회구성원에게 좋은 것일까?



세균과 바이러스, 인공제품으로 인한 인체와 지구에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에 관해서의 태도도...


우리 몸에 나쁜 것에 몸이 반응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아픈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약자가 되어버린다.

이들은 어떠한 사회의 공기, 이물질, 음식, 화학제품에 반응하는데, 이것이 인간 육체와 지구에 좋지 않아서 반응한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를 캐치하지 못한다. 이러한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 이 사회의 일상의 어떠한 것이 우리 인간과 지구에 안 좋은지 좋은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저 아픈 사람을 치료만 하고, 안 아픈 사람들은 계속 그 물건을 쓰고 공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한다. 아픈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위험신호를 발견하는 능력과 민감성이 있는 것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약자로서 너네도 둔해지라고 얘기한다.

사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그런 나쁜 물질이 이 사회에 없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호를

무시한다.



나.


어려서부터 특이한 생각을 가진 아이라고들 했다.

그 말이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뭐가 특이해? 나는 너무 평범한 엄마아빠와 가족이 있고, 금수저도 흙수저도 아닌 대략 중산층에서 공교육 받고 자랐다. 최대한 주변인들과 잘 어울리고자 했고,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 안 갔지만 이해하려고, 적어도 그저 받아들이기라도 하려고 애썼던 것 같고, 친구들 지인들은 이래저래 나를 좋아해 주었고, 나도 내가 성격 좋은 줄 알았고,  내 생각이 좀 다르긴 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궁금해하면서도

내가 그 다수의 생각과 공감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지금 그래서인지 사회성이 길러졌고 뭐 좋은 점도 있지만


난 항상 나 같은 사람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적어도 내 기억에 고등학교 때부터도 나 같은 사람을 만나 평생 친구를 약속할 사이의 소울메이트나, 아니면 나를 알아봐 줄 선생님이나 어른을 만나고 싶었고, 이렇게 살다 보면 만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끔 나 같은 사람을 발견한 것 같으면 힘이 되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고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올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내가 있다.


심지어 나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고

나 자신도 좋은 영향만 주고 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힘을 잃지 않도록, 당신이 옳다고 감히 은근히 귀띔해주고 싶기도 하다.

내가 그런 것이 필요했을 때에 그렇게 나타나 준 수많은 존재들처럼.



자신이 그 다수가 아니어서 소외감 느끼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본인은 그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

소수가 다수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

희귀한 그 소수는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이 사회에 이바지하라고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그리고 소수가 수가 많아져 다수가 되면 -> 다수가 수가 적어져 소수가 되면

그때에는 다수였던 소수 또한 그렇게 느낄 것이고 아마도 소수였던 다수는 또 의도치 않더라도 지금의 다수인 소수가 그렇게 하듯이 그렇게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 지금 이러한 상태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

차별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묵묵히 혹은 힘차게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나아가 권리를 주장해도 (아니, 주장해야!) 되는 것.



사회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동양사회는 좀 집단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 집단과 다른 점이 있으면 소외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인데

소수의 다양성이 좀 더 인정되는 사회에서라면 내가 좀 더 나의 성향을 사회에 발현시켰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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