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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 Klarblau Feb 09. 2024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이

어른들은 어린이를 사랑하나요? 

다른 대상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개념은 각자에게 서로 다르겠지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고, 그 사람이 살아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 어른들은 특히 세상의 어느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그 자식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들 하였는데, 너무나 당연하다고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도) 나는 대부분의 부모들에게서의 행동에서 그러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라는 것과 보여주는 것은 다른 어른들


어린이의 시각으로서,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을 망치는 행위를 버젓이 행하고 있었다. 

영화나 책의 등장인물들, 뉴스나 광고의 이야기들, 심지어 내 눈앞의 어른들의 일상행동, 자기 자식 바로 앞에서 부모들의 행위 등 수많은 부분에서 그들은 어린이가 살 세상의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쓰레기를 만들었다. 어린이에게는 이래라저래라 가르치면서 정작 본인들은 우리에게만 그러라고 하는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매우 납득이 가는 바람직한 이래라저래라도 많았지만)

어른들은 왜 자기들 말과 행동이 다를까 하는 의문하에 그런 행동이 공장에서 뿡뿡 뿜어져 나오는 까만 매연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내 뇌의 어느 곳에 있다. 


어떤 어른들은 자기 돈이 들면 아껴 쓰면서 남의 돈이 들거나 공공재는 함부로 쓰기도 하였다. "00야, 여긴 공공시설이니까 물 좀 많이 써도 돼."  이런 식의 말, 어렸을 때에 한 번쯤은 들어본 분들 많을 것이다. 집에서는 아껴 써야 하고 밖에서는 막 써도 된다...

자연을 보호하라고 학교에서도 배우고 어떤 어른들은 훈계도 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정작 어떤 어른들은 물건도 함부로 쓰고 버리기 십상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그게 다 너네 어린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물건, 사회구조, 뉴스에 나오는 어른들의 말과 행동은 어른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과 다르게 만들어져 있었다. 기성품들은 왜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지, 저걸 만든 사람은 왜 끝까지 이러이러한 것까지 만들지 않았는지,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멈추고 세상을 그런 물건, 그런 사회, 그런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지에 대한 이해는 잘 안 되었다. 


혹은 많은 어른들은 세상을 비판하고 잘못됐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고치지 않고 그렇게 계속하는지 등 이상한 것이 많았는데, 왜 그렇냐고 물어보면 저러저러한 사람들은 잘못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고 (-> 그런 사람은 나쁜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서 나쁜 행위도 하는 사람 하고도 함께 살고 어쩌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사회가 그러니까 너도 그래야 좋은 어른이 되는 거야.", "너희가 어른이 되어 보면 다 알 거야."라는 역시나 믿기 어려운 말이 진짜이기를 바랐다. 


학교 다니면서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며 지학, 불혹, 지천명, 이순의 상태가 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배우기도 했고, 그렇다면 30살쯤 된 어른들부터는 적어도 세상을 알고 60살쯤 되면 이제 통찰력 있게 살아가는,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작은 실수 정도는 늘 있지만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어른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믿고자 했으며, 그래서 그 어른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은 납득은 좀 안 갔지만 우선은 따라보기로 했던 것 같다. 우리 이 세상은 대다수가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세상이었고, 나쁜(?) 사람은 소수이고 다수의 정의에 의해 고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생각과 경험이 있으시므로 내가 이해 못 하는 이유는 경험과 지식이 없어서이므로 우선 따라가다 보면 나도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어른들이 이루어 놓은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이 세상은 어쨌든 부조리했고, 그 모습을 인정하기엔 내가 너무 불쌍하고 세상이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사는 게 인간 사는 거라며 신나게(?) 세상 열심히 망가뜨리는 어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아휴 저렇게 세상을 막 망쳐 놓으면 우리는 저걸 나중에 어떻게 돌려놓나.' 

나는 저런 어른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이렇게 하나하나 더러워져가는 세상을 막지 못하는 나와 우리 어린이가 사회적 약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작고, 힘도 약하고, 나이도 어리고, 저걸 통제할 능력도 권한도 없었다. 사실 이론적 논리적으로는 나라도 저런 어른을 혼내는 게 맞는데, 그러면 어른들은 어린 게 그런 말 하는 게 기특하다고만 하고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잘 안되면 막 혼나고 우리 부모님이 애 잘못 키웠다고 남들에게 혼날 것 같으니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원래 좋은 세상을 어른들은 왜 자기 손으로 망가뜨리는 걸까?

사실 다른 어른들도 (다 자기들도 저런 어른이면서) 저런 어른이 나쁜 사람이라고 했고, 나 또한 세상에 왜 저런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어른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을 텐데 아무리 '덜'배웠더라도 저렇게 확실히 나쁜 짓을 왜 하지? 


정말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을 보호하며 사는 어른들은 그때 다들 어디에 있던 걸까?




성인이 되고 어느 정도 성숙했다는 나이가 된 요즈음, 지금의 10대와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떨까 생각해 보곤 한다. 예전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여전히 똑같은 부분도 있는 이 세상을 사는 그들에게 이 세상과 인간의 삶과 국가란 나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일 것 같다. 

그들에게의 어른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지구와 자연의 경이와 아름다움과 가치는 매우 다를 테지. 숨도 마음껏 쉴 수 없고 물도 걸러 먹어야 하는 지금 이 모습이 그들에게는 자연환경일 텐데. 


나도 사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스마트폰과 온갖 통제시스템하에서 사회부품화와 일꾼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긴 하지만 그나마 그전 세대에게 보고 들은 것들이  있고 어렸을 때의 작은 경험을 그것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실낱같은 연결고리라도 갖고 있어서 무언가 비교도 할 수 있고 추억도 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것이 추억이고 아련한 기억이 될지, 20년 후 즈음 들어보면 어떤 관점에서는 신기할 것들, 한편으로는 미안할 것들이 많을 것 같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없을 이 세상


이제 어른이 된 나의 세대에는 나의 기성세대보다 더  생각 없이 기계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가 싶기도 하다. 사회가 점점 어떻게 되어가든, 내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결국 어떤 영향을  미치든,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시스템 구축이 더욱 가속화되어 가 보이는데 그런가? 지금은 훨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인지 혹은 더욱 조직적으로 치밀히 가둬진 자유인지조차 판단이 어렵다. 

분명한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빠르고 감각적인 판단이 우선시되었고, 몸 움직이지 않고 편안한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돈이 생기는 것이라면 좋은 것인 세상이다. 

나 자신 또한 그렇게 살도록 휘몰아쳐지는 상황에 자꾸 내몰린다. 남들 다 하는 대로 살면 어쨌든 살아지기는 한다. 그동안 나도  그런 시스템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왔고,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와 '남들은 다 그렇게 해.'의 사이에서 내적갈등과 함께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제대로 사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수많은 정보바다에서 헤엄쳐 왔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무얼 가르쳐줄 자격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정말 어린이들이 아이들이 아기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어른보다 더 잘 안다는 말에 점점 공감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면서 그들의 직감을 죽이는 결과가 더 많기도 하다는 생각도 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말에 이래저래 맞장구치기도 한다.


지금의 어린이들 중에서도 조금은, 혹은 많은 어린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에 느꼈던 어른들의 이상한 행위에 대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몇십 년 전의 나도 그 이상한 어른들에게 분노했는데, 지금의 어린이들은 그 분노의 범위와 정도가 그때보다 훨씬 클 것이다. 적어도 공기는 확실히 숨도 마음껏 못 쉴 정도로 더러워졌으니까. 


지구가 이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그때 내가 어렸을 때에도 어른들이 다 같이 자연을 보호했더라면 지금 공기는 예전 같았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어른들이 다 같이 탄소배출을 줄이면 30년 후의 그들이 그나마 지금 같은 세상에서라도 살 수 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중에 지금의 어린이들이 만일 화를 낸다면, 왜 그때 안 그랬냐고 나중에 그들이 물으면 어쩌지?


그때 나 혼자라도 발뺌하고 싶을 텐데

나 그러면 적어도 그런 이상한 어른이 아니었던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보련다.


그래서 나 하나라도 최대한 그들에게 안 미안하게 살아봐야겠다. 어차피 나도 엄청나게 사회화되어서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힘이 세지도 않고, 월등히 똑똑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로 평범하지만, 눈코입과 팔다리가 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이라도 어디냐 싶고, 겸손하게라도 살아가야 후회 없는 삶이 될 것 같다.





사실 난 아직도 조금은 지금 성인이 된 어른들이 하는 행위가 다 이해 안 가는 건 아닌데,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몇 차원 얽혀 받아들이게 되어 이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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