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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라 Klarblau Feb 22. 2024

사유하는 인간 되는 방법

질문을 못해서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질문하지 못하는 사회라는데

( 근데 질문...! 그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작 본인이 질문을 받는 것을 좋아할까? )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나도 질문을 하면 안 좋은 환경 영향을 받고 자랐다.

학교에서도 질문 있으면 하라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막상 질문을 하면 다른 학생들도 싫어하고 선생님도 그걸 다 받아주지도 않는 등 하니 질문은 하면 안 좋은 것이었다.


게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왜 그러는 건지 물어보면 공격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경험하면서

질문하는 자는 '같은 편이 아니다'라던가,

그냥 듣고 된다고 받아들여야지 왜 다른 방법을 들고 나와 토를 단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고도 했다

-> 그냥 듣고 그런가 보다 해야지 딴지 건다?

그런 거였을까.

암턴 나는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궁금증을 내 안에 대략 가둬두기로 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런 시선들이 사회에 여기저기 깔려있는 것 같고

그래도 언젠가부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게 유행이 되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질문 내용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주거나 새로운 시선이라는 쪽으로 받아들여 주는 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의 어린 시절 기억에는 종종 이런 물음에 싫어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 몇 시선들이 나의 성장에 영향을 꽤나 준 건 맞고

언젠가부터는 궁금한 것은 속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반항 잘 안 하고 주변에 순응하는 성향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하게 사고하라?


아마 우리 한국인 대부분이 질문 없이, 생각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 왔을 것이다.

다들 어렸을 땐 궁금한 것도 많았을 텐데

부모님과 선생님과 주변 인간관계를 통해, 조용히 있으면 칭찬받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아이들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질문 못하도록 훈련이 되어서 정말 질문이 없는 뇌가 형성된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다행히(?) 질문거리를 없애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조용히 어디선가 그럴듯한 답변을 찾거나 발견하며 나만의 사유의 스타일이 생긴 듯하다. 생각하기는 몰래 그렇게 계속되었고, 저런 현상은 왜 저런가, 나는 왜 이런가를 혼자 관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질문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그럼에도 질문을 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질문을 그때 안 했어도 되는 것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질문하지 않아야 하는 세상 덕분


당장 외부에서 해결을 못한 것을 내 내부에서 해결해야 했으므로 나 스스로 나의 생각의 방법과 논리를 만들어 가게 되었고

그것이 자칫 아집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아집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자기 스타일의 생각방향은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그리고 질문의 표현법이 매우 (좋게 말하자면) 다듬어졌다. 직접적으로 말고 간접적으로 표현한다던지, 질문 한 문장 하기 전에 그 앞에 몇 문장은 더 붙이고 수식어 생각하고 순화적 표현을 있는 대로 끄집어내어 공손체로 질문하는 훈련을 계속해 왔다. 동양식, 한국식, 일본식 화법... 그러다 보니 뭐 하나 물어보려면 시간과 수고가 드니, 차라리 안 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지게 되기도 했다. 피곤하고 힘 딸리면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

타인에게 상처 주고 오해 주느니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그냥 가만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20대 즈음부터는 조금씩 질문을 해도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마케팅과 디자인학업에서는 소위 창의적인 생각과 질문이 허용되었기에, 내 삶의 어느 집단에서는 나의 사고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히려 디자이너라면 엉뚱한 말과 행동이 어느 정도 용납이 되기도 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호기심과 질문을 드러내는 것이 용납이 되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조금은 내 안의 수많은 질문거리를 감추지 못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했다. 특히 독일에서의 디자인학업에서는 교수님들도 나의 그런 태도를 매우 인정해 주었다. 웬만한 독일학생들보다 새로운 생각과 표현이 나의 특징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외국인이라서, 그리고 예술인이라서 평범하지 않은 생각의 소유자라는 시선은 분명 있었고, 독일의 개인주의적 사고가 함께하여 그곳의 사람들과 다양한 생각을 교류하면서 더욱 나는 나만의 생각을 좀 더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직접화법을 쓰는 서양의 대화에서 자유를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 문화에서도 나름 예의를 갖추는 언어와 화법이 있지만, 한국의 대화법에 비하면 그 방법이나 정도가 참 달랐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도 괜찮거나 오히려 그래야 했던 그 문화, 그리고 질문이 매우 자유로웠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더욱 내 안의 질문거리를 완전히 묻어놓지는 않을 수 있던가 싶다.



아직 궁금한 것들이 다 해소되진 않았지만, 그걸 다 알고 죽기는 힘들 것 같고,

이젠 그 궁금증을 생각하면 설레거나 답답한 정도가 약해지고 있고,

궁금한 것 몇 개만 해결하고 인생 마쳐도 대단할 것 같아서 예전만큼 새로운 것들에 마음을 덜 쓰기로 했다.  

어쩌면 아쉬울 부분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국사회는 아직까지 질문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게 마련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주어진 대로 살도록 훈련되어 있고, 지금 학생들도 그렇게 살도록 사회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궁금하면 바로 묻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환경에 있어왔더라면 더 생각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었을까?

사고의 전환과 창의적 발상 운운하는 시대이지만 정작 학교와 사회에서는 생각 없이 살도록 가르치는데.

막상 본인이


"왜요?"

"다르게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이런 물음을 받는다면 반가운 사람이 어느 정도 있는가 궁금하다.


나도 내게 누가 질문해 주는 것이 너무 좋다. 사실 질문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해도 다들 비슷한 질문들을 한다.

그니까 질문 이왕이면, 이미 많이들 질문해서 내가 앵무새 같은 답 해야 하는 그런 질문 말고

뭔가 새로운 질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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