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은 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뇌경색과 뇌혈관의 파열로 뇌조직 내부로 혈액이 유출되는 뇌출혈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출처: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뇌내출혈의 경우 사망률이 약 40-50%에 이르며, 생존자의 경우에도 지속적인 혼수, 반신마비, 언어장애와 같은 후유증이 심한 경우가 많아 20-30% 정도에서만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이 된다. (출처:삼성서울병원 질환 정보-뇌출혈)
뇌졸중 생존자들은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재활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 시기에는 골든타임이 존재하는데 보통 뇌졸중을 겪고 3~6개월 까지를 그 시기로 본다. 이때 환자의 회복 속도와 정도가 가장 빠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이 더디어진다고 한다. 엄마는 1월 31일 좌측 기저핵 뇌내출혈을 겪었고, 2월 13일 동일한 부위에 재출혈이 있었다. 쓰러지시고 일반 병실로 오시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계실 땐 살아만 돌아와달라고 빌었는데, 막상 엄마가 살아 돌아오니 나에겐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이전의 엄마로는 못 돌아갈 수도 있지만 적어도 골든타임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최대한 치료를 받았으면 했다.
나의 바람은 그렇게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재활의학과 교수님은 엄마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최소한의 재활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엄마가 받을 수 있는 치료시간은 하루에 단 30분이었다. 경사 침대에 서서 전기자극치료를 받고, 5분 정도 운동치료사 선생님이 물리치료를 해주셨다. 엄마 옆자리 환자분은 연하 치료, 작업 치료도 받으셨는데 엄마는 물리치료 1개밖에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애간장이 탔다.
담당의 선생님께 재활 치료를 조금 더 받을 수는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곤란하다고 했다. 병원으로부터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꼈고, 불가능한 것을 바라기 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의식이 깨어나는 데 현재로서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휠체어를 타는 것이라고 주치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마비가 와서 몸이 축 늘어진 상태라 나 혼자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엄마가 머무른 병동은 간호 간병 통합 병동이라 조무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기 위해 세 분에서 네 분이 병실에 오셔서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셨는데 아무래도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 이따금씩 본인이 힘들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아까 오전에 휠체어 타셨던데, 또 타셔요?”
라고 나한테 물어보는 분도 계셨고, 가끔 눈빛으로 본인의 힘듦을 나에게 표현하시는 분도 계셨다. 그냥 못 들은 척, 못 본 척했다. 그리곤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음료수를 건네 드렸다.
“네, 저희 엄마가 낮동안 많이 주무셔서 교수님이 이렇게라도 깨우라고 하시네요. 휠체어 태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타인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나이기에 저런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다. 물론 환자가 휠체어를 타는 것을 돕는 것도 그분들의 일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민폐라고는 할 수 없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어떻게든 용을 써서 혼자 해냈을 텐데… 이건 나 혼자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기에 뱃속에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듯한 그 불편함을 감내하고 그분들께 부탁하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애를 쓰는 내 마음을 엄마가 조금은 알긴 하는 건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는 누운 듯한 자세로 휠체어를 타고 병원 구석구석을 다녔다. 엄마가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만의 세상에서 내가 있는 세상으로 넘어 오기를 기도했다. 병원 내의 탁한 공기에서 잠시 벗어나 옥상 공원의 보다 맑은 공기도 같이 마셨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봄바람이 엄마의 얕은 겨울잠을 완전히 깨우기를 바랐다.
병원 1층 카페 통유리창 앞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우리 예전에 아빠랑 같이 경주에 벚꽃 보러 갔다가 차에 갇혔던 거 기억나요? 그때 벚꽃 신나게 구경하고 나서 집에 돌아갈 때 차 밀려가지고 엄청 고생했잖아. 우리 내년에는 병원에서 말고 바깥에서 벚꽃 구경 해야죠. 얼른 일어나셔요.’
눈을 감고 있는 엄마 귀에 대고 혼자 이야기하는 것에 나는 금방 익숙해졌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데 생각보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이렇게 같이 못 있어서, 옆에서 응원을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엄마가 병원에서 나가면 같이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까지 하루 종일 옆에서 조잘거렸다.
병실에서는 태블릿으로 엄마가 좋아하던 음악을 같이 들었다. 역시 음악인이라 그런지 어느 날부터 손가락을 움직이며 음악에 맞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범 내려온다’ 뮤직비디오의 화려한 영상미에 반한 엄마는 처음으로 2분 이상 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유튜브에서 배운 관절 운동을 조금씩 해드렸다. 서투른 내 손길에 엄마가 힘들었을 순 있지만 엄마의 관절이 굳지 않길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하루 1번 침상 목욕, 가래 배출을 위한 호흡기 치료 3번, 4번의 콧줄 식사, 10~15번 내외의 석션, 3~4번의 기저귀 케어, 휠체어 산책 그리고 엄마를 위한 나만의 재활 프로그램을 다 소화하려면 내가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해야 했다. 여기다 1주일에 3일은 하루에 네 시간씩 투석을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눈동자의 초점을 맞춰서 날 봐주시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전 사랑한다는 나의 말에 눈을 깜빡여주는 엄마에게 고마웠다. 그 눈 깜빡임은 내가 힘들 때마다 다시 기운을 내게 하는 일종의 비타민이기도 했다.
컨디션이 많이 회복된 엄마는 3월 말에 머리뼈를 복원하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복원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수술 후 엄마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4월 중순에는 혈액투석을 위한 동정맥루 조성술을 받으셨고, 이 시술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첫 번째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 뇌출혈을 겪고 3개월이 다 되어서야 엄마는 다른 대학병원으로 이동해 재활 치료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활 치료가 늦어져서 내 마음이 조급해지긴 했지만 엄마는 엄마만의 속도로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