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 복도를 하나 두고 같은 열에 앉은 장년 남성이 말을 붙인다. 탄자니아에서 십수 년을 산 적 있는 이였다. 행선지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외계인이 피라미드를 지었다로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독서, 여행, 담화 (맥락상 낯선이 와 대화), 이 세 가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설교로 이어진다. 나는 이 노인에 대한 '이 죽일 놈의 호기심'이 일었다.
할배는 지구가 멸망 중이라고 했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은 고갈 중이며, 우주의 별들이 하나씩 소멸 중이라 머지않아 지구별도 소멸할 거라고 했다. 플라스틱 사용도 문제인데, 핀란드 국민 일인당 일회용 비닐 사용량이 1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의 사용량은 100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다. 돌고 돌아 다시 피라미드는 유배된 외계인이 자신의 별을 그리워하며 건설했다고 했는데, 내가 너무 크게 웃어서일까, 짐짓 진지한 얼굴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며, 생전 보지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은 논리라고 했다.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약간 커서 (다행스럽게도) 잘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 사이엔 복도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묻기를 몇 번 시도했지만 매번 그렇게 하긴 미안해서 못 들어도 들은 척, 그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조상, 출신지, 학력, 경력까지 다 털린 후엔, 오래 일한 단체에 문제가 있어 동료들과 다 같이 그만뒀다고 하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딱하게 나이만 먹어서 어떻게 하느냐며 생을 돌아보니 피 터지게 싸운 지난날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많다 하더라.
나는 주로 청자였으므로 관찰자적 모드로 일관했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는 말을 놓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요즘 한국 '아가씨'들은 '겁대가리' 없이 혼자 여행을 잘 한다며 껄껄 웃어젖혔다. 왜 여자들이 겁대가리가 있어야만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인지에 대해서 일평생 고민한 흔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걸까. 왜 저리 혼자만 말할 수 있을까. 왜 겁대가리 없는 아가씨에게 아무 말이나 아무 주제나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말하기에 '자기 검열' 이 시급해 보였다.
내 호응력이 그의 뻘소리 레벨을 높인 측면이 있지만 시간은 빨리 사라졌다. 간간히 흥미롭기까지 했다. 먼 나라로 여행 가는 비행기 안이라는 특정한 공간만이 던지는 화두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이 본 아프리카의 여러 아름다운 풍광들과 (어두운 밤 반딧불 묘사는 죽여줬다) 무용담, 특히 값싸게 휴양하러 간 곳이 알고 보니 소말리아 해적 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는 서늘한 이야기까지. 유용한 지식을 얻기도 했다. 예컨대 세렝게티의 뜻은 endless plain 즉 끝도 없는 평원이라는 뜻이고 safari 역시 그저 trip, 여행이라는 의미라는 것 정도. 경유지에 내려서는 연결 편 비행기 승강장을 찾아주기까지 하더라. 도움을 주는 일은 늘 그렇듯, 그의 몸짓과 발걸음은 고무되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안녕. 영원히.
그리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또 하나의 겁대가리 없는 여자, 내 사랑하는 동생을 만났고, 나흘이 흘렀다. 여행을 하고, 소설도 읽고, 낯선 이들과 '담화'도 나눴으니 생은 나흘 전보다 풍요로워졌으려나. 무엇보다 이 곳 공기는 내내 맑고 청량하다. 이 글을 읽은 당신에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