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랑관장 Jan 01. 2021

코로나와 해외여행

'위험'과 '자유' 양립 가능성에 대하여 


어쩌면 동생이 제주가 아니라 해외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제주 어디서 묵는지, 풍경 사진 좀 보내라 해도 좀처럼 듣는 척도 하지 않아서 말이다. Sns 계정에 뭐가 올라와도 한참 전에 올라왔어야 했는데, 사진 보내보라는 내 요구에 울 집 고양이 사진이나 보내라는 말을 돌려받으니 아뿔싸 이건 뭔가 잘못됐다. 혹시 진짜 혹시나하고 설마 지금 외국이냐고 물었다. ‘아니’라는 말 대신 ‘놀라지 마’라는 말이 돌아온다. 허얼. 장난인가? 아니다. 나의 촉은 말한다. 이건 레알이다. 맙소사. 서랍을 막 뒤진다. 설마 그래도 나갈 리 없다 없다 없다 여권이 없다. 멘붕이다. 


몰타라고 했다. 지중해 어느 섬나라. 배낭 달랑 하나 메고 떠났는데. 가죽 잠바 두 개를 두고 뭘 챙겨갈지 고민 고민하더니 낮 기온 28도까지 오르는 나라에 가죽 자켓을 가져간 거냐. 날 속이기 위한 알리바이 때문에??!! 어쩐 일인지 마스크를 바리바리 싸더라니. 여행용 압축팩이라는 것까지 사서 옷을 쟁여 넣더라니. 하아. 사람 속이면서까지, ‘이 시국’에 그렇게 까지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가야 하는 건가,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니 못 갈건 또 뭔가. 뜯어말린다고 안 갔을 인간도 아니고 최근 해외여행 가고 싶다는 말에 정신이 있냐 없냐 과격한 말을 내뱉는 나를 상기하며 속일 법하다고 납득하는 중. 


그나저나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났나. 코로나 상황이 나쁘지 않은 나라 골라 온 것이니, 그리하여 한국에 있는 거보다 감염 확률은 더 낮고, 방역수칙도 잘 지키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말에 나는 과연 코로나 감염에 대한 우려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나를 속이고 간 것에 화가 난 건지, 여전히 대다수 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전의 행동 양식을 버리고 움츠러든 현실 속 그 자유분방함은 방종이라 여긴 탓인지, 동생이 마치 요트 사러 떠난 강경화 남편처럼,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조롱하는 트럼프처럼 느껴졌다. (엄밀하게는 강경화 남편 쪽에 가깝다) 여전히 동생의 여행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 동생의 안전 감각은 내 것과 어떻게 다른 건가, 아니 보다 정확히는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따라붙은데 이는 곧 사회로부터 지탄 내지는 비난받게 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국가가 방역수칙이라는 내놓고 관리 감독에 들어가는 순간, 어찌 됐든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는 감시자가 된다. 이 시국에 클럽을, 이 시국에 피시방을 이 시국에 노래방을 가는 사람을 싸잡아 방역을 해치는 개념 없는 사람이라 비난하는 프레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옮아가자 위험이란 게 원천적으로 봉쇄 불가능한 거라면 이때 ‘안전’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 건지, 위험과 자유가 양립하기 위해선 사회는 어떤 꼴을 갖추어야 하는 건지에 까지 생각이 번진다. 아 머리야.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 사진이나 보내라고 하니. 그제야 순순히 사진을 보낸다. “제주도 같지?” 하며 보낸 사진은 너무 지중해 같다. 좋냐 물으니 인생 최대 행복을 누리는 중이라며. 자기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아니겠냐고 위로하는데. 하아.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린다는 옛말이 떠오르는 데 이게 그럴 일인가 싶다가. 실은 어쩌면 이 시국에 지중해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 화가 난 건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생활비가 떨어질 거 같으니 빌려준 돈 갚으란 말에 빡이 친 건지도 모르겠다. 에라이.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찌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