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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리 May 12. 2021

피아노를 쳐도 될까

내가 감히 피아노를 쳐도 될까

내가 감히 피아노를 쳐도 될까* 

먼 타국에서 낯을 많이 가리고 
말수가 적은 교환학생이었던 나는 
경영학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음대에 갔다 

캠퍼스 내에서도 혼자 숲 속의 
성처럼 다소 떨어진 위치에 숨은 
예술대 건물은 어쩐지 내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싼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를 걸을 때면 서늘한 바람에 
자잘한 새소리가 실려 오고 
운동화에 반사된 햇볕이 희게
반짝였다

그렇게 숲 속 성의 계단을 오르고
천천히 복도를 걷다가 어디선가
굉장히 웅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 잠시 멈춰 섰다

처음 건반에 닿는 순간부터
소름이 돋을 만큼 도입부에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곡이었다  

분명 전에 들어본 것 같은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서
나중에 연습을 마치고 나온 학생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금발인지 갈색인지 헷갈리는
옅은 색의 머리칼을 어깨너머로
늘어뜨리고 안경을 쓴 학생이 상냥하게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빈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날 칠 수 있는 피아노가 크든 작든
상관없었다

자그마한 연습실에 들어서면
오직 피아노와 나만 있는 안락 하면서도
한편으론 심장이 두근거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의자를 고쳐 앉을 때
삐걱대는 소리, 중간중간
악보를 넘길 때의 감촉,
음이 손가락 끝으로부터 건반을 지나
현을 타고 방안에 진동되던 감각

귀를 통해 들어온 소리가 
머리와 마음을 스치고
뉴런에서 기쁨이라는 이름의
신경전달물질을 전하고
운동신경을 자극하여
다시 손끝에 가장 얇은 모세혈관까지
뻗어가서
그다음 건반을 누르게 하는
신비한 여정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 여정은 계속되어도 좋을 것 같아
매일매일을,
시험이 있는 날에도 최소 네 시간은
피아노를 쳤다

강의 시간 외에는 거의 음대 건물에
살다시피 했기에 모르는 학생들은
아마 전공이 그쪽인 줄로 알았을 것이다

다행히 남는 피아노 연습실이
충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로는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피아노를 눈을 감고 감상하기도 했다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힘차거나 동화 속의 풍경처럼
환상적인 음악이 공중에서
생생하게 울려 퍼지다가
실시간으로 사라졌다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리고
오직 그 순간에 몸의 감각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음악은
분 매초의 시간, 그리고 결국
삶 그 자체와 속성이 같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건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당시의 느낌들을
다시 불러낼 수 없는 시공간을
엉성하게나마 떠올리고
추억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악보를 잘 볼 줄 모른다
그나마 유치원 때 바이엘을 조금 배웠기 때문에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왼손 오른손을 따로 움직이는 건 가능했다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된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내 손으로

악보에서 도레미가 어디 인지 모르고
대체 건반 어느 부분에 있는 도레미인지
잘 몰라서 계이름을 하나하나 적고
눌러서 소리를 내보며 연습했다

그렇게 베토벤 둘, 모차르트 하나,
그리고 쉬운 영화 ost 몇 곡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라흐마니노프와 쇼팽을 연습 중이던
친구가 지쳤는지 잠시 내 악보를 빌려가
분위기 환기 겸 휴식 삼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3악장을 즐겁게 쳤다

당시 나는 2악장을 더듬거리며
겨우 치고 있었는데 손가락이 짧아
치지 못하는 부분에서 왼손을
잠시 오른쪽으로 가져와서 건반을 누르는
방법을 알려준 고마운 친구였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던
그때 그 친구들은 모두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직 피아노를 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오늘,
거실에서 수건을 팡팡 털어 널다가
뚜껑에 먼지가 내려앉은
크림색의 오래된 전자피아노를 바라본다

예전에 타국의 울창한 숲 아래에서
기쁜 발걸음에 반사되던 햇볕이
지금은 거실에 장식처럼 놓여있는
피아노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

뭔가 미안해서 먼지를 닦아본다
피아노를 다시 보는 게 얼마만인지
어색하다

몇 군데에서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음악보다 건반이 덜컥거리는 소음이 더 큰
낡은 피아노 앞에 앉는다

내가 감히 피아노를 쳐도 될까
그때 쳤던 베토벤을 다시 쳐도 될까

이렇게 서투르고 어설픈 소나타 연주를
세상에 내놓아도 될까

볼륨을 작게, 아주 작게 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 Do I dare to eat a peach?' from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by T. S. Eliot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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