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리 Jan 22. 2021

샤워를 한다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본다

샤워를 한다.


더운물을 틀자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문밖으로 달아난다.


눈에 담았던 사람과

귀로 들었던 소음

코로 맡은 냄새

혀로 맛본 음식

피부로 느낀 세상

머리에 남은 찌꺼기가

뭉개 뭉개 피어나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알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

알기 때문에 오는 편견이

비눗물에 씻겨 내려간다.


어깨 가득 지고 있던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본다.


이러이러해서 미운 사람

이런저런 힘든 일들

질투와 서러움

권태와 외로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허기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


모두 내려놓고 한번 돌아보니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오늘 빠진 머리카락과

어제 정돈한 손톱 끄트머리가

더는 내가 아니듯이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이

내가 아닌 것을 알 때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덜어냈다는 것조차

잊었을 때


아주 가벼워지고

투명해져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면


더 이상 괴로움은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고

머리를 감는다.


샤워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