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서 축구가 사라진 진짜 이유

아이들을 '공을 찰 수 없는 무균실'로 보낸 어른들에게

by 인문 도슨트

운동장에는 아이들의 함성 대신 기묘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공을 차다 넘어질까 두려워 축구 골대는 장식품으로 전락했고, 등수를 매기는 일이 상처가 될까 봐 운동회는 승패 없는 무승부의 향연으로 끝을 맺습니다. 졸업식에서조차 상장을 없애고 스승의 날에는 감사의 편지 한 통조차 거절해야 하는 이 경직된 풍경은 우리가 알던 배움의 터전이라기보다 흡사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는 거대한 실험실을 연상케 합니다. 수학여행과 현장체험학습마저 사고의 위험이라는 명분 아래 사라져 버린 지금, 학교는 더 이상 추억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무사고의 성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철저한 금지의 장벽을 세운 것은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사랑이 아니라, 사실은 책임지기 싫어하는 어른들의 비겁한 공포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 생긴 작은 생채기는 곧장 악성 민원이라는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교사를 위협하고, 친구와 다투며 화해하는 과정은 학교 폭력 위원회라는 사법적 절차로 비화하기 일쑤입니다. 결국 학교가 선택한 것은 교육적 가치가 아니라 법적 안전장치입니다. 모든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어떤 문제의 소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이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은 아이들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구축한 방어 기제에 불과합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경고한 위험 사회의 징후가 교육 현장에서는 가장 기형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위험을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우리는 아이들이 마땅히 겪어야 할 성장의 통증까지 마취시켜 버렸습니다. 넘어지고 깨지며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 할 시기에 우리는 그들의 무릎에 보호대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뛸 기회조차 박탈해버린 셈입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며, 아이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온실 속의 화초처럼 관리하기 쉬운 객체로 전락시키는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어른들의 논리와 소송의 공포가 아이들의 세계를 식민지화하면서 정작 그곳의 주인이어야 할 아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숨겨진 치명적인 역설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그 무균실이 사실은 아이들을 가장 허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갈등을 해결해 본 적 없는 아이, 패배의 쓴맛을 모르는 아이, 그리고 타인에게 사탕 하나 건네받으며 감사를 배울 기회조차 차단당한 아이들은 사회라는 거친 광야에 나서는 순간 작은 바람에도 쉽게 부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승부로 끝난 운동회에서 그들이 배운 것은 평등이 아니라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냉소일 것이며, 사라진 상장과 편지 속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공정이 아니라 삭막한 단절일 것입니다. 민원을 예방하겠다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아이들에게서 마음의 면역력을 기를 기회마저 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금지된 학교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그들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혜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학교는 작은 사회여야지, 사회와 격리된 무인도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 교문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혹시 모를 소송에 대비하는 어른들의 서류 뭉치와 불안한 눈빛뿐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어른들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아이들의 역동적인 성장을 담보로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며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할 때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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