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의 사각지대, 도서관
우리는 바야흐로 접속이 소유를 대체하는 거대한 스트리밍의 바다를 부유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스치면 지구 반대편의 음악이 흐르고 거실에 앉아 최신 영화의 픽셀을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이 디지털의 파도 위에서는 1초의 시청과 한 번의 클릭조차 정교한 셈법으로 환산되어 창작자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갑니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아주 미세한 취향의 흔적까지도 자본으로 치환하는 기민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토록 촘촘한 자본의 그물망이 유독 성기게 풀려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우리 지성의 오래된 안식처인 도서관입니다. 음악과 영화가 재생될 때마다 저작권료라는 이름의 미세한 보상이 발생하지만 작가가 피를 깎아 쓴 책이 대출될 때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침묵뿐인 이 기이한 현상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화적 인식의 지체를 보여주는 가장 서늘한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도서관은 지식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신성한 성소임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빈부의 격차 없이 평등하게 지혜의 숲을 거닐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문명이 발명한 가장 아름다운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작가 입장에서 이 시스템은 자신이 지은 집을 무료로 개방해야 하는 의무만 지워진 채 정작 건축가 자신은 그 집 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형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음악가는 스트리밍 횟수에 따라 정산받고 배우는 재방송료를 챙기지만 작가의 책은 한 권이 도서관에 들어가는 순간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손을 거치더라도 추가적인 대가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치 책이라는 물성을 구매하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영혼과 노동까지 영구적으로 공공에 헌납된 것으로 간주하는 무언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공공성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창작 노동을 지우는 전근대적인 시선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미셸 푸코가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규명했듯 우리는 지식을 공공재로 규정하면서 은연중에 그 지식을 생산해낸 주체의 권리를 축소하거나 삭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전기를 켜는 비용과 사서의 인건비 심지어 정수기의 물값조차 예산으로 집행되지만 정작 도서관의 존재 이유인 콘텐츠를 생산한 작가에게 대출에 따른 보상을 지급하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문화 복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창작자의 희생을 연료 삼아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며 작가를 전문 직업인이 아닌 낭만적인 봉사자로 여기는 낡은 인식의 소산은 아닐는지요.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은 치명적입니다. 책이 사랑받을수록 즉 더 많은 사람이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볼수록 작가는 역설적으로 더 가난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출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차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K-콘텐츠의 위상을 자랑하며 지적 재산권의 중요성을 부르짖지만 정작 그 모든 콘텐츠의 원천 소스인 텍스트를 다루는 작가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외의 수많은 선진국이 이미 공공대출권을 도입하여 작가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문학적 성취를 배고픈 예술가의 숭고한 정신승리로 포장하며 그들의 정당한 몫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지점은 이러한 불공정이 결국 창작의 토양 자체를 황폐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실한 농부가 수확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밭에서 누가 씨를 뿌리려 하겠습니까. 작가들이 생존을 위해 붓을 꺾고 자극적인 상업주의로 내몰리거나 아예 창작의 세계를 떠나버릴 때 도서관의 서가는 영혼 없는 활자들로 채워진 텅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며 느끼는 그 지적 포만감이 누군가의 굶주림을 대가로 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정의로운 독서라 할 수 없습니다. 매끄러운 디지털 정산의 시대에 책 한 권에 담긴 고유한 노동의 가치를 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문화라는 이름의 가장 화려하지만 가장 적막한 폐허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