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전부 연애시야” - <우리 모두> 레이먼드 카버
언어는 스킨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다고 한다.
"Language is a skin," wrote Roland Barthes in A Lover's Discourse. And so is skin a lanuage. It speaks when words fail us and communicates to parts of ourselves that are beyond the reach of words. - A Circle of Arms, Tracy Young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는 피부이다”라고 썼습니다. 피부도 언어입니다. 그것은 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때 말하고,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일부와 소통합니다. - A Circle of Arms, Tracy Young (구글 번역)
바흐의 평균율을 더듬더듬 연습하면서 그가 만든 언어의 스킨, 그가 만든 사물을 부분 부분 구축하며 얻는 기쁨은 나의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쌓아올린 언어의 스킨을 음미하고 향유하는 독자의 기쁨은 어떤 것인가.
누군가는 발견하고 누군가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완벽한 형체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조각들을 보고 뭔지 모르지만 아름답다고 여길 수도 있고.
나는 오늘 피아노 연습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도자기 연습하던 시절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단상> 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은
언어는 살갖인데 그 언어로 연인 - 욕망하는 이를 만지는 행위를 말한다.
언어는 살갖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는 내 말 끝에 손가락이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
만지는 행위 - 언어로 더듬는 것이다. 어루만지려 시도하는 행위이다.
그 행위는 직접 더듬을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무언가 알 수없는 이유로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함을 느끼기 때문일까.
알리고 나누고 그것에 대해 연인에게서 - 혹은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끌어내려는 시도다. 이게 낯설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경험때문이겠지. 이야길 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때문에 ‘나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한번 들어봐줄래’
하고 시작하지만 그것은 결국 애무가 되어버리는 스토리.
막 시작한 연인이 얘기만으로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는 그런 스토리.
계속 뭔가 써야한다고 느끼던 그 마음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약간의 노래를 듣고 조금의 글을 읽고 그리고 일어나서 집안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뭔가 쓰려고
폴 오스터의 인터뷰를 읽다가 종이에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영감받아서 쓰고 있다.
아침에 평균율 멜로디를 연습하며 무슨 생각인가 했었는데 그것은
이 곡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이다.
‘내가 이러저러한 음들을 나열할게.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네가 하나하나 직접 건반을 만져서 쳐봐야 하는데 결코 처음에 그것들을 알 순 없어. 처음엔 그저 아름다움을 느끼면 돼. 그런데 연습이 반복되면서 너는 음들의 나열에서 멜로디를 발견한다. 그리고 조금씩 형상을 창조한다. 그게 어려운 곡이 있고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발견하는 누구에게나 같이 발견되진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 믿음으로 시작한다. 즉 처음에 어떤 것에 대한 혹은 작곡자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 위에 쌓아가고 발견해가는 견실한 믿음인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믿음, 매력적이라 믿는 믿음, 이 사람은 매력적이라는 믿음 말이다. 이 사람이 주는 것은 매력적이야, 이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혹은 내가 끌릴만한 어떤 것을 보여줄 거야.’
인간에게서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의 살갖을 충분히 느끼면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언어가 없다면 그는 나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무언의 느낌과 표정과 시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무언의 언어다. 그것을 내놓는 방식, 그 언어는 기쁨을 줄수있다. 그것은 매력적일 수 있다. 매력은 취향을 타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매력을 가진 어떤 것이 하는 말을 들을때 우리는 분석한다. 저 언어가 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때로는 분석하기도 전에 그것에 감싸이고 싶고 들으면서 전율한다.
피아노가 시이고 그 시를 그저 읽어내려가거나 구축해간다는 나의 생각이 약간 바뀐 것은 오늘 본 롤랑 바르트의 글 때문이다. 그는 언어가 살갖, 피부, 스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스킨은 내가 만지고 싶은 것인지, 나는 그것에서 어떤 그림을 읽어내는지, 그리고 이윽고 그것은 나를 감싼다. 내가 읽음으로서 그 스킨이 내게 닿는 것이다. 시는 향유하는 것인가, 시는 그 자리에 있고 내가 다가가서 샅샅이 훓고 살피면서 그 맛을 감상하는 것인가, 틀렸다, 나는 그 부분에서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 시는 나를 향유한다. 시가 나를 훓는다. 시는 유혹하려고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래서 어떤 시엔 감탄하고 기꺼이 나를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어떤 시는 그렇지 않다. 피아노 연주는 그 자체로 나를 만지고 여기저기를 두드린 것이다. 그것도 나의 손으로 창조한 그 리듬과 그 운율로, 그 멜로디로 말이다. 나를 연주하고 나를 향유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빨려들어가듯 그 앞에 앉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처음보는 악보에 주춤하면서 오늘의 즐겁고 비밀스런 익숙한 희롱을 포기하는 기분이 왜 뭔가를 잃는 기분인지 알겠는가. 그것은 노력을 요한다. 나는 그것과 익숙해지고 어떻게 다루는지 알기까지는 다른 모든 곡들과 나누었던 교감과 반응을 염두에 두면서 신중하고 인내심있게 손가락과 뇌와 감정을 움직여가야 한다. 두터운 스킨이, 두터운 음악의 부피가 나를 덮칠때 나는 어떻게 하는가. 몸을 흔들던지 고개를 숙이고 감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있고 들을때마다 나를 흔든다. 누군가의 살갖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때, 그의 언어의 조합이 나에게 짜릿함을 줄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꺼이 이 사람의 이야길 듣고 기억하고 반응하는 내적 동기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또 말하고 그가 듣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존재를 알리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며 언어로 나라는 사람을 부분적으로 구축하려는 시도는 왜하는가. 때로 언어는 터치보다 더한 감각으로 어루만진다. 내면의 어떤 것을.
어떤 사람은 왜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많은 말을 전하는 걸까. 그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편 살갖이 언어다. 거칠고 딱딱하고 힘있는 손은 무얼 전해주는가. 길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은. 축축한 연인의 손은? 긴장하고 있다는 마음을 알려주는가. 어떤 사람의 살갖이 부드럽고 따뜻할 때 그 사람의 마음도 그럴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연체동물은? 뼈없이 딱딱한 껍질을 만들어내는 것은?
살갖 그 자체는 외면적인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터치함으로서 내면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작가 Tracy Young이 A Circle of Arms에서 말한것처럼 때로는 말보다 따뜻한 한 번의 포옹이 효과적일 때도 있고,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헤어드레서와 꽤 진지한 잡담을 나눌 수도 있다. 피아노는 일종의 페티시라고 하는 의견을 처음 들었을때 아득해지면서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맞다. 어쩌면 피아노 건반을 더듬거릴때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과 울리는 소리 그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서 그 사물이 나에겐 더이상 사물이 아니며 둘도 없는, 교감할 수 있는 존재, 영혼을 가진 어떤 것으로 인식되고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환상과 황홀함을 기대하며 그 앞에 앉게 된다.
때로는 그 살갖에 닿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나를 터치한다. 우리는 눈으로 봄으로서 그 질감에 대한 상상에 빠진다. 내가 가진 살갖에 그가 다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연체동물의 안쓰러움. 나는 그가 언어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행위, 어떤 차갑고 단단한, 피없는 것을 만지작거리는 것에서 알수 있는 본질. 그는 딱딱하고 차갑고 빛나는 것을 갈구한다. 왜냐면 자신에게 없는 특질을 가진, 언제나 휘감을 수 있고 착 달라붙어 애착감을 느낄수 있는 강인한 것에 보호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무생물이 아니면 그것을 줄 수 없다. 다른 것들은 반응하고 피하거나 멀어지거나 빛을 잃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어둠을 싫어하지만 어둠속에 있다. 어둠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는 할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언제까지고 헤엄치고 싶다. 육지의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접촉을 갈구하고 습기를 찾아 헤맨다. 자신의 습기로 그것에 숨을 주지 않으면 그는 살아갈 수가 없다. 햇볕에 데고 말라버린 껍질은 그에게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자꾸만 어디론가 숨으려하는데 그래서는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가 없다. 그는 검은 양복을 상복처럼 두른다. 검은 가방을 든다. 죽음을 메타포처럼 두르지 않고는 도무지 세상에서 살아나갈 자신이없다. 일단 죽음의 껍데기를 쓰고 죽음에서 유예를 얻자. 한번 죽은 것이 또다시 죽을 수는 없다. 한번 살아있는 것은 살아갈수 있지만 죽을 수도 있다. 언어를 잃은 살갖이 그자체로 언어를 만들어내려 시도한다. 젖은 피부, 젖은 머리카락 젖은 눈빛 젖은 손가락 젖은 행동 휘둘리는 해초처럼. 약함과 부적응을 말하려는 걸까. 반대로 강인함을 말하려는 걸까. 수분이 수분을 씻어낸다. 그에게서 약한 살갖을 거두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