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봤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뿔테 안경, 호리호리한 체격.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저씨 같으면서도, 안경 너머 눈빛만큼은 마감에 쫓기는 편집장처럼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반갑습니다. 극단 가치 대표 S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연출가이자 가끔 희곡도 쓰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목소리에서 무대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계산해 온 사람 특유의 내공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물어보지도 않은 극단의 연혁을 말해주는데, 분명 지루해야 마땅한 ‘남의 역사’ 이야기에 마치 대하드라마 예고편을 듣는 것처럼 내 귀가 쫑긋해졌다.
“마침 타이밍이 좋네요. 2주 뒤부터 ‘페스티벌 조’가 짜이거든요. 그전에 와서 분위기 한번 보시고 입단 결정하세요.”
무심한 척 툭 던지는 영업 멘트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솔깃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쭈뼛거리며, 하지만 아주 절박하게 물었다.
“저... 그런데요. 아까 벽에 붙은 MT 사진을 봤는데... 다들 너무 어리던데요? 저는 40대 아줌마인데... 저 같은 사람도 신입 단원이 될 수 있나요?”
S 대표가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었다.
“아, 그 사진요? 그거 몇 년 전에 찍은 겁니다. 업데이트를 안 해서 그래요. 40대도 많습니다. 참고로 저는 50대입니다.”
그뤠?
그 말이 마치 구원처럼 들렸다.
사진은 일종의 사기였구나. 아니 아니, 과장 광고였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내 또래, 아니 나보다 ‘어르신’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속 바리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S 대표가 알려준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거의 뒷조사 수준으로 피드를 훑었다.
게시물이 엄청 자주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알찼다.
단순히 친목 도모나 술판 모임이 아니었다.
매주 발성 연습에, 상황극 훈련, 대본 리딩까지.
창단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산전수전 다 겪은 ‘찐’ 극단이었다.
장난이 아니구나. 여기서라면 진짜로 배우 흉내라도 내볼 수 있겠구나.
망설임은 배송만 늦출 뿐.
나는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적힌 S 대표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 공연에서 인사드렸던 사람입니다. 극단 가치 신입 모집에 관심 있어 연락드려요. 입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장은 칼같이 왔다.
S 대표는 친절하게 입단 절차를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내 동공을 흔들리게 했다.
[신입 단원은 연기 맛을 좀 봐야 하니까요, 독백 발표가 필수입니다.]
네? 독백이요?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그거? 혼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독백? 회사 PT 발표보다 더 떨리는 단어였다.
‘그냥 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 찰나,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멘토가 정해지면 한 달 동안 지도해 줄 겁니다. 배우고 나서 발표하면 돼요.]
멘토라니. 과외 선생님을 붙여준다는 거잖아?
그럼 해볼 만하지 않나? 공짜로 연기 레슨도 받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비장하게 답장을 찍어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오프라인 모임 날짜 알려주시면 참석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제 발로 호랑이 굴, 아니 연기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백이 뭔지도 모르는 40대 신입의 무모한 도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