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결전의 화요일, 정모 날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풍경은 어제와 똑같은데, 내 마음은 롤러코스터 꼭대기에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 퇴근하면 늘 가던 집이나 어쩔 수 없었던 모임 장소가 아니라, 나만을 위한 어떤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짜릿했다.
퇴근 직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거울 속 내 얼굴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썰물처럼 밀려드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살을 에는 영하의 칼바람에 두꺼운 롱패딩으로 온몸을 무장했는데도, 발걸음은 헬륨 가스를 마신 풍선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피곤에 절어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영혼 없이 서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빽빽한 만원 지하철 속, 나 혼자만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스파이가 된 것처럼 심장이 쫄깃했다.
극단 연습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중앙 로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라? 오늘 모임이라고 했는데… 날짜를 착각했나?
알고 보니 배우들은 평소에는 건물 중앙 문이 아니라, 건물 옆구리에 숨겨진 쪽문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낡은 철문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한 칸, 두 칸. 눅눅한 냄새가 훅 끼쳐 올 때마다 심장 박동수도 함께 올라갔다.
끼이익-. 낡은 나무 문을 열자 눈앞에 무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객석에는 20대,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파릇파릇한 청춘들 열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맙소사, 다들 조카뻘이잖아!’
그랬다. 나는 대표님에게 사기를 당한 거였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40대도 있다"던 대표님의 말은, 극단 창단 이래 통틀어 한 명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무대를 가로질러 빈자리를 찾아가는 그 짧은 시간, 내 등 뒤로 꽂히는 열다섯 쌍의 시선이 따갑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웬 이모님이 길을 잃고 오셨나.’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이어진 자기소개 시간, 나는 이름과 가입 동기만 짧게 말했다.
나이? 그건 일단 1급 기밀이다.
"자, 몸풀기 시작하겠습니다. 무대 위로 둥글게 모이세요!"
모여서 함께 하는 간단한 스트레칭이 끝나자마자 괴상한 소리들이 연습실을 채웠다.
"가! 갸! 거! 겨! ... 후! 휴! 흐! 히!"
발성 연습이라는 거였다. 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를 뱉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연극 발성에서 제일 중요한 복식호흡이라고 했다.
복식호흡이 안 되면 소위 '쌩목'을 쓰다 성대가 상하는 건 물론이고, 대사가 객석 끝까지 뻗어나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힘없이 흩어져 버린다고 했다.
나도 질세라 배에 힘을 주며 따라 해 보았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뇌에서 보낸 '배에 힘 줘!'라는 신호가 뱃살이라는 두터운 방화벽에 가로막혔는지 자꾸만 전송 실패가 떴다.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나와야 하는데, 자꾸 가슴만 빵빵해졌다.
머리와 배 사이의 와이파이가 끊긴 게 분명했다.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풍선처럼 나와야 한다는데, 내 배는 요지부동이고 자꾸만 가슴만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 젊은 친구들,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다.
매주 하는 루틴일 텐데 장난기 하나 없이 소리를 뱉어낸다.
그 열기에 질 수 없어 나도 다시 뱃가죽이 당기도록 "가갸거겨"를 외쳤다.
몸풀기가 끝나고 S 대표가 다시 무대 중앙에 섰다.
"오늘은 연극 놀이를 해보겠습니다."
연극 놀이? 수건돌리기 같은 건가?
"자, 모두 무대 위를 일상적으로 걸어보세요."
그 한마디에 배우들은 각자 다른 세상에 빠진 듯,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무대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마치 행인 1, 행인 2, 행인 3이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어다녔다.
나도 쭈뼛거리며 발을 뗐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상적으로 걷는 게 뭐지? 내가 평소에 어떻게 걷더라? 팔을 얼마나 흔들지? 땅을 보고 걷나, 앞을 보고 걷나?
평생을 걸어왔는데, 막상 걸어보라는 멍석이 깔리니 로봇처럼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영역이었던 걸음걸이를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낸 순간, 걷기는 고차원적인 철학적 난제가 되어버렸다. 남들은 어떻게 하나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 이제 기분이 좋은 느낌으로 걸어 보세요."
큰일 났다. 지금 내 기분은 긴장과 당황 그 자체인데, 기분 좋은 걸음걸이라니. 나는 뻣뻣한 다리에 억지로 리듬을 실어 보려 애썼다.
입꼬리를 귀밑까지 억지로 끌어올렸다. 소위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걸어보려 했으나, 마음과 달리 몸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걸로는 부족해. 더 즐거워 보여야 해!'
에라 모르겠다, 나는 팔을 군인처럼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약간의 점프까지 섞어보았다. 흡사 고장 난 목각인형의 탭댄스 같았으리라.
바로 그때, 내 어설픈 몸짓을 보다 못한 S 대표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신입 단원님! 너무 작위적이에요! 연기는 흉내 내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하세요, 자연스럽게!"
'작위적'이라는 말에 안 그래도 굳어있던 몸이 석고상처럼 아예 굳어버렸다. 하지만 대표의 주문은 내 멘탈을 수습할 틈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자, 이번엔 하늘에서 갑자기 돌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걸어보세요!" "이번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이 지쳐 있을 때의 느낌으로!"
내 주변의 젊은 친구들은 버튼만 누르면 화면이 바뀌는 TV 채널처럼 순식간에 돌변했다. 공포에 질려 머리를 감싸 쥐고 구르거나, 금세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걷는 그들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반면 나는 주파수를 못 맞춘 라디오처럼 혼자만 치직거렸다. 하늘에서 돌이 떨어진다는데 피하기는커녕 '어, 돌이네?' 하고 멍하니 서 있거나, 지친 걸음을 걷다 말고 눈치를 보느라 두리번거리는 꼴이라니.
폭풍 같은 첫 정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갈 때의 그 설렘과 다짐은 온데간데없었다. 낯선 공간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했던 탓인지, 승모근이 돌덩이처럼 굳어 뻐근해져 왔다. 자동차 룸미러에 비친 지친 내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과연 저 파릇파릇하고 끼 넘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을까? 편안한 저녁 시간을 반납하고 사서 고생을 시작한 건 아닐까? 역시 괜히 시작한 걸까?'
후회가 밀물처럼 발목을 넘어 가슴을 적시려던 찰나,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내 버킷리스트 맨 윗줄에 적힌 '연극 배우 도전'은 또다시 '언젠가'라는 라벨이 붙은 채 먼지 쌓인 서랍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40대가 되어 겨우 꺼낸 용기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그래,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잖아. 삐걱거리는 관절에 기름칠 좀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내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속의 물음표가 '해보고 싶다!'라는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다시 현실의 집으로 복귀했다.
문을 열고 가족들에게 "나 왔어!"라고 외치는데, 어라? 기분 탓일까. 방금 내 목소리, 발성 연습 덕분인지 왠지 좀 배우처럼 울림이 좋았던 것 같다.
내 심장은 다시 다음 주 화요일을 향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걷는 연기보다 백 배는 더 민망한 '독백 연기'와, 나를 참교육(?) 시켜줄 20대 선배님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