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 지하철에서도 머릿속은 온통 화요일 밤 생각뿐이었다.
'이번 주엔 또 어떤 기상천외한 연극 놀이를 시킬까?' 하는 설렘도 잠시, 신입의 통과의례라는 '독백'이 숙제처럼 마음을 짓눌렀다. 틈만 나면 ‘여자 독백', '눈물 연기 잘하는 법'을 검색하며 혼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다가 표독스러운 악녀가 되었다가 하며, 나름대로 나만의 비공개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S 대표가 던진 말은 내 예상을 보란 듯이 빗나갔다.
"신입 단원님, 독백은 나중에 하고요. 마침 다음 주부터 페스티벌 기간이거든요. 그거 먼저 합시다."
페스티벌? 거창한 이름에 쫄았는데, 알고 보니 1년에 한 번 열리는 단원들끼리의 잔치 같은 거라고 했다. 조를 나눠 15분 내외의 짧은 극을 올리는, 그야말로 우리끼리 즐기는 축제 같은 개념이란다.
나는 S 대표의 손에 이끌려 이미 짜여 있다는 한 조에 배달되었다. 엉겁결에 합류한 우리 조는 기존에 나와 있는 대본이 아니라 창작극을 준비 중이었다.
"자, 아이디어 회의 시작할까요?"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내공이 느껴지는 조장 아가씨의 노트북이 켜지자마자, 조원들의 입에서는 불꽃놀이처럼 아이디어들이 팡팡 터져 나왔다.
"이런 설정은 어때요?" "여기서 이렇게 반전을 주는 거죠!"
LTE급 속도로 오가는 아이디어 핑퐁 사이에서, 내 낡은 두뇌 회로는 '버퍼링'만 무한대로 돌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어찌나 빠르게 오가는지, 그 속도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 하마터면 목 디스크가 올 뻔했다.
심지어 누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누구는 즉석에서 벌떡 일어나 그 장면을 연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 아니 대사 잊은 배우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거침없는 순발력을 보고 있자니, 지난주에 느꼈던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다시 몰려왔다.
끼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여기 껴도 되는 걸까?
결국 긴 회의 끝에 우리는 당시 이슈였던 무안공항 참사 사건을 소재로, 슬픔을 넘어선 위로와 희망을 담은 대본을 쓰기로 결정했다. 주제마저 너무나 진지하고 묵직했다.
다음 날부터 내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지징- 지징- 지징-
숨 쉴 틈도 없는 출근길 만원 지하철, 사람들 틈에 샌드위치처럼 꽉 끼어 있는데 가방 속에서는 스마트폰이 연신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단톡방: 우리 조는 무대뽀]
"아까 생각난 건데, 도입부에 뉴스 속보 소리를 넣는 건 어떨까요?"
"오! 좋아요. 그럼 조명은 핀 조명으로 가고...“
"마지막에 다 같이 노란 종이비행기를 객석으로 날리는 건 어때요? 희망을 전달하는 의미로!"
"완전 찬성! 그리고 엔딩에서는 서서히 암전되면서 여운을 남기죠!"
이 사람들, 회사 안 가나? 아니면 다들 한가한가?
점심시간에 밥을 씹는 와중에도, 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카톡방은 불이 났다. 그들은 24시간 깨어있는 사람들처럼 대사에 대해, 동선에 대해, 감정선에 대해 토론했다.
놀라운 건 그 태도였다. 누구 하나 "그건 별로야"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것도 좋은데, 이건 어때?"라며 서로의 의견을 놀라울 정도로 존중했다.
겨우 15분짜리 콩트다. 관객이라고 해봐야 우리끼리, 혹은 지인 몇 명이 전부일 무대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예술의 전당 대극장에 올릴 작품을 준비하는 장인들처럼 비장했다.
도대체 저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뜨겁게 만드는 걸까?
퇴근하면 침대와 한 몸이 되기 바쁜 40대 과장은 그들의 무보수 무한 열정이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부러웠다.
며칠 뒤, 드디어 배역이 정해졌다.
내 역할은 이모.
대사는 딱 두 마디였다.
"아이고, 오느라 고생 많았죠?." 그리고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신입 배려 차원인지, 내 연기력을 간파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꿀도 이런 꿀이 없었다.
그래, 대사 두 마디면 부담 없고 좋네. 적당히 즐기면서 하면 되겠다.
안도하는 나에게 조장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앞으로 3주 동안 연습 일정 잡을게요. 주 3회, 평일 저녁 8시! 괜찮으시죠?"
"네? 주... 주 3회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건 워라밸을 넘어 취라밸(취미-라이프-밸런스)을 찾으러 온 나에게 주객전도 아닌가? 대사 두 마디 치려고 일주일에 세 번을 야근하듯 나오라고?
"아... 그게 제가 요즘 직장일이 바빠서..."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조원들의 눈동자를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 초롱초롱하고 순수한 열정의 눈빛 앞에서 "피곤해서 못 해요"라고 말하는 건 유죄라는 것을.
"아... 네... 뭐, 해... 봐야죠. 하하."
그렇게 나는, 대사 두 마디를 위해 매주 세 번 칼퇴근에 저녁을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내돈내산 고생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