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간 나는 김 과장이 아니라 ‘김 이모’로 살았다.
설거지하다가도 대사를 중얼거리고, 빨래를 널다가도 허공에 대고 손짓을 했다.
출근길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내 입 모양은 계속 달싹거렸다. 누가 봤으면 영락없이 접신 들린 무당이라 생각했을 거다.
드디어 결전의 날.
무대 뒤 대기 공간에 서 있는 내 심장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당장이라도 가출을 시도할 태세였다
쿵! 쾅! 쿵! 쾅! 갈비뼈가 이 미친 박동을 견디지 못하고 으스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마르고, 손바닥은 홍수가 난 듯 축축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한다고 했을까? 그깟 버킷리스트가 뭐라고.
40년 넘게 무난함을 추구하며 살아온 인생 최대의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청심환이라도 한 알 씹어 먹고 올 걸. 아니, 애초에 내 인생에 연극은 관람만 있었어야 했다. 직접 실연이라니, 이건 명백한 판단 착오였다.
"자, 큐!"
스태프의 수신호와 함께 음악이 깔리고, 칠흑 같던 무대에 환하게 조명이 들어왔다.
드디어 심판의 시간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주인공 D와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우처럼. 가자, 전우여.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이모와 조카처럼 무대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갔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관객들의 시선이 내 얼굴에 와서 턱, 하고 박히는 게 느껴졌다. 저 어둠 너머 수십 개의 눈동자가 오직 우리만 보고 있었다.
으악, 토할 것 같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주저앉으면 어떡하지? 염소 목소리가 나오면 어쩌지?
내 뇌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망가'라는 비상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무대 한가운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뒤였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첫 대사를 뱉었다.
"아이고, 오느라 고생 많았죠?"
어라?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 왜 이렇게 안정적이지? 분명 속으로는 사물놀이패가 꽹과리를 치고 난리 굿을 피우고 있는데,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매끄럽고 또랑또랑했다.
심지어 주인공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내 눈빛, 세상 자상한 국민 이모 그 자체였다.
준비한 두 마디 대사를 치고 무대 뒤로 돌아오자 묘한 근자감이 솟아올랐다.
뭐야, 나 40년 만에 드디어 숨겨왔던 내 적성을 찾은 건가?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무대 체질?'
불과 1분 전만 해도 심장이 터질까 봐 청심환을 찾던 쫄보 아줌마는 온데간데없고, 조명발 좀 받았다고 금세 자아도취에 빠진 아줌마가 그곳에 서 있었다.
무대 뒤 가벽에 뚫은 눈구멍을 통해 공연을 보았다.
그런데 연습 때는 날아다니던 젊은 친구들이 긴장해서 대사를 씹거나 동선을 헷갈리는 모습이 보였다.
‘휴, 다들 연기 기계인 줄 알았더니 그냥 사람이었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극은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렸다.
내가 건넨 낡은 영정사진을 주인공 D가 받아들었다. 그의 눈가는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고, 굵은 눈물방울이 턱 끝까지 차올라 뚝뚝 떨어졌다. 단순히 우는 흉내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 순간 그는 어머니를 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들이 되어 있었다.
"저... 이 사람 알아요."
그의 오열에 객석의 공기마저 무거워졌다.
이제 내 차례다. 조장 아가씨가 특별히 만들어 준 나의 회심의 한 마디.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라고, 대사를 던지며 주인공이 극의 반전을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인공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서? 아니었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현타가 뒤통수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조명, 관객들의 눈동자, 숨소리...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나 회사원 김영영이잖아. 그냥 평범한 아줌마가 여기서 배우 흉내를 내고 있는 거잖아.
재능 없는 아줌마의 객기라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려는 찰나,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의식적으로 대사를 뱉어냈다.
"네?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내 대사가 신호탄이 되어 웅장한 음악이 깔렸고, 주인공 D는 무대 중앙에서 멋지게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가벽 뒤로 퇴장했다.
무대 뒤, 좁고 어두운 공간.
가벽 틈새로 핀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D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연습 때는 그저 노래 잘하네 싶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주책맞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건 이모의 눈물일까, 김영영의 눈물일까.
주인공의 마지막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무대가 잠시 암전되었다가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15분간의 짧고도 길었던 항해가 끝난 것이다.
무대 중앙에 서 있던 주인공 D는 무대 뒤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숨어 있던 배우들을 한 명씩 무대 위로 불렀다. 이른바 커튼콜이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조연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고 객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와아아아-!"
쏟아지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
물론 이 박수의 9할은 주인공 몫이겠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고작 15분짜리 콩트를 위해 한 달간 미친 듯이 달린 우리 모두에게 주는,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용기를 낸 나에게 주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소리였다.
"영영 님! 오늘 진짜 최고였어요! 뒤풀이 가실 거죠?"
"아, 아니에요. 저는 내일 일찍부터 일정이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요."
흥분한 단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극단을 빠져나왔다.
뒤풀이까지 가서 술잔을 부딪치면, 이 사람들과 걷잡을 수 없이 친해질 것 같았다. 이미 한 달 넘게 이어진 주 3회 연습으로 취라밸은 박살 났다. 여기서 인간적인 정까지 깊어지면 내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적막함이 낯설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조명 아래서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지금은 벗어 던진 양말 짝만 뒹구는 거실이라니.
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멍하니 서 있었다.
아까 대사 톤을 좀 더 높일 걸 그랬나? 표정을 더 슬프게 지었어야 했는데...
끝났다는 후련함보다는, 알 수 없는 허무함과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연기의 맛을 아주 조금, 혀끝으로 맛본 대가는 생각보다 씁쓸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덮었다. 이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S 대표]
"영영 님, 뒤풀이 같이 못 해서 아쉽네요. 오늘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데, 메시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S 대표]
"자, 이제 쉴 틈 없죠? 다음 주부터 바로 독백 들어갑니다. 대본 파일 보낼 테니 희망하는 연기 3개 골라오세요."
...이 사람들, 진짜 지독하다.
조금도 쉴 틈을 안 주는구나. 악덕 기업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허무함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또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독백? 그래, 까짓것 해보지 뭐. 오늘보다는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내일 일정은 내일의 김 과장이 알아서 하겠지. 오늘의 배우 김영영은 얼른 대본을 골라야 하니까.
대본 파일을 열었다. 저마다 한두 페이지 정도의 짧은 독백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손으로 휠을 굴렸다. 그러다 마우스 커서가 한 페이지 위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