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꼰대력이 연기력으로

by 최아영

"자, 여기서부터는 뮤지컬 느낌으로 가볼까요?"


주인공 역을 맡은 20대 청년 D가 벌떡 일어났다. 키 185cm에 아이돌 뺨치는 외모. 그는 연습실 공기를 찢을 듯한 성량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하 연습실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순식간에 브로드웨이의 향기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는 게 눈와 귀로 느껴졌다.


"와... 미쳤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우리 조, 생각보다 고퀄리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덜너덜했던 대본은 살이 붙어 그럴듯한 희곡이 되어갔고, 연습이 거듭될수록 조원들의 연기도 무대에 서는 전문 배우 태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감탄 뒤에는 묘한 꼰대 마인드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좋겠다, 젊어서. 체력도 좋고, 시간도 많으니까 저러지. 나처럼 내일 아침 회의 자료 걱정하고, 집에 가서 가족들 밥 걱정해야 하는 아줌마 직장인이었어 봐. 저렇게 못 하지.’

나는 그들의 열정을 넘치는 시간과 젊음의 특권쯤으로 치부하며, 스스로의 저질 체력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언니! 저 내일이랑 모레는 연습 못 나올 것 같아요."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던 중, C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최근에 창업한 가게가 어려워져, 낮에는 사장님으로, 밤에는 호프집 알바를 뛰는 투잡러였다. 그가 연습에 나오는 날은 유일하게 알바를 쉬는 날이었다.


그뿐인가. K는 연습실까지 왕복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인천 끝자락에서 부천까지, 오직 이 15분짜리 연극을 위해 퇴근 후 세 번이나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는 것이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고, 피곤한 몸을 갈아 넣어 이 자리에 오고 있었다.

겨우 대사 두 마디라며 적당히 때우려 했던 사람은 혼자 바쁜 척하는 40대 김 과장, 바로 나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대충 하자 모드에서 메소드 연기 모드로 급선회했다.

"이모 역할이니까 의상은 뽀글이 파마 가발에 몸빼 바지 어때요? 사투리도 좀 쓰고요!"

"대사 톤을 좀 더 걸걸하게 바꿔볼까요? 우리 이모가 딱 이런 스타일이거든요."


우리는 각자의 배역 분석 시간도 가졌다. 나는 배역 분석에도 진심 모드가 되어 있었다.

"이 이모는 뭘 좋아할까?" "매운 닭발에 소주?" "아니야, 의외로 클래식을 들으며 뜨개질을 할 수도 있어."

비록 대사는 "아이고, 오느라 고생 많았죠?"랑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딱 두 마디였지만, 나는 이모의 MBTI부터 성장 과정, 숨겨진 첫사랑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오버 액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왔다.

똑 부러지는 우리 조장이자 연출인 아가씨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영영 님! 요즘 영영 님 연기 너무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녀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영영 님이 주인공에게 엄마의 유품인 사진을 건네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대사도 하나 더 추가해요."


"무... 무슨 대사요?"


"주인공이 놀라면, 영영 님이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럼 주인공이 오열하면서 노래가 빵! 터지는 거죠."


세상에. 내가 클라이막스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이라니!

단역 행인 1에서 갑자기 신 스틸러로 신분 상승을 한 기분이었다.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차올랐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을 때와는 또 다른, 날 것 그대로의 짜릿한 성취감이었다.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걸 어떻게... 크흐흐흣!."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밤거리의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입가에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사 한 줄 늘어난 게 뭐라고, 조장에게 칭찬 한 번 들은 게 뭐라고.

40대 아줌마 김영영의 발걸음이 콧노래와 함께 둥실 떠올랐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김 과장이 아니라 배우 '김영영'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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