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켰다. 검색창에 ‘직장인 극단’을 입력했다.
와, 세상에 직장인 극단이 이렇게나 많았나? 다들 나만 빼고 재미있게 살고 있었구나.
나도 이제 낮엔 김 과장, 밤엔 오필리아로 아주 스펙터클하게 살아보리라.
그런데 스크롤을 내릴수록 내 자신감도 함께 내려갔다.
공연 사진 속 그들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조명, 분장, 그리고 저 여유 넘치는 표정들.
그들 사이에 낀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백조 무리 사이의 미운 오리 새끼? 아니, 오리면 다행이게? 나는 그냥 동네 털 빠진 닭이었다.
게다가 사진 속 그들은 다들 어찌나 친해 보이는지.
텃세는 없겠지만, 저 끈끈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연습 장소: 강남.”
탈락. 우리 회사는 강북이다.
“연습: 주 3회 참여 필수.”
탈락. 야근은 누가 해주나.
다들 집에서 멀거나, 너무 전문적이거나, 너무 빡세거나였다.
검색 이틀 만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 버킷리스트는 원래 죽기 직전에 하는 거지.’
불타오르던 열정은 정확히 48시간 만에 차게 식었다.
이렇게 김 과장의 반란은 불발탄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때, ‘카톡’ 알림이 울렸다.
지인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애들 데리고 공연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하는 건데, 혼자 가기 뻘쭘해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를 공연하는데 그집 아이랑 엄마가 같이 나오는 거래.]
공연?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라니, 솔직히 기대는 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스크루지라니 너무 뻔한 레퍼토리 아닌가.
가서 하품 참느라 허벅지나 꼬집다 오는 건 아닐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위치를 찍어보니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할 일도 없는데 마실이나 가자 싶어 “콜”을 외쳤다.
도착한 곳은 부천의 어느 구도심.
예전엔 공장 지대였지만, 지금은 ‘임대 문의’가 더 많이 붙은 낡은 건물들이 빽빽했다.
“이런 데 소극장이 있었다고?”
의심하며 따라간 곳은 한 허름한 건물 앞이었다.
간판이 보였다. <극단 가치 소극장>.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안내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실의 습한 냄새와 함께 묘한 나무 냄새가 났다.
마지막 계단을 디딘 순간,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투박한 조명들.
순간, 심장이 찌릿했다.
화려한 대극장보다, 소극장의 칠흑 같은 어둠이 더 섹시해 보일 줄이야.
공연은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 공간만 빌려서 하는 작은 발표회였다.
내용은 그저 그랬다.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내 눈은 무대 그 자체를 훑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를 서성였다.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는 지난 공연의 흔적인 포스터들을 찬찬히 훑었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같은 많이 알려진 극부터, 처음 들어보는 창작극 제목들까지.
‘직장인 극단이라며? 전용 극장도 있고 창작도 해?’
생각보다 체계적인 곳 같았다. 잠시 중지시켰던 마음속 보일러가 다시 윙윙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심코 ‘신입 단원 모집’이라고 적힌 포스터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건을 읽어보는데, ‘주 1회 연습’이라는 문구가 내 눈에 형광펜 칠한 듯 꽂혔다.
매일 출근 도장 찍으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이라면 해볼 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니 퇴근 후에 밥 먹고 가도 충분했다.
드디어 내 묵은 버킷리스트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발견됐다.
바로 벽 한쪽에 붙은 MT 단체 사진!
사진 속 얼굴들을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아니, 젊다! 너무 젊잖아!
죄다 20대 아니면 30대 초반이다. 사진 속 얼굴들에서 콜라겐이 뿜어져 나왔다.
내 또래인 40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도.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현타가 왔다.
내가 저 사이에 끼면 '이모님' 소리 듣기 딱 좋겠는데?
내가 뒤풀이라도 갈려고 하면 “라떼는 말이야.” 같은 소리나 할까 봐 다들 질색하겠지?
연기도 안 해본 생초보에, 나이도 많은 늦깎이 불청객.
입단 신청서는커녕 문전박대나 안 당하면 다행일 것 같았다.
‘역시,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무슨 배우야. 그냥 그동안 해왔던 대로 관객으로 만족하자.’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가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연극에 관심 있으신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