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린다. 아침 7시.
일어난다. 아니, 눈을 뜬다. 억지로 뜬다.
세수, 지하철, 회사, 커피, 보고서, 점심, 또 커피, 회의, 퇴근.
Ctrl+C, Ctrl+V. 복사 붙여넣기 한 듯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
마흔이 넘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 솔직히 말하면 지겹다.
가슴 뛰는 일? 그런 건 20대 때나 쓰고 이제는 안 써야 되는 단어다.
가끔 멍하니 천장을 보며 공상에 빠진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버킷리스트’가 떠오른다.
그러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피식 웃는다.
퉁퉁한 뱃살과 퀭한 눈동자가 보인다.
나 스스로에게 충고한다.
"최 과장, 꿈 깨세요. 내일 보고 자료나 준비하셔야죠."
나도 한때는 유난히도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때는 이십 년 뒤의 지금 내가 이렇게 시시한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다.
한때는 열심히 연극을 보러 다녔다.
없는 돈을 털어 가끔 하는 취미생활이라 그랬는지, 대학로는 공기부터 달랐다.
소극장에서 나는 그 퀴퀴한 먼지 냄새도 좋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좁은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뿜어내는 배우들을 보는 거였다.
내가 수족관에서 시름시름 눈빛을 잃어가는 양식어라면, 그들은 갓 잡은 자연산 활어처럼 펄떡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정말 매력 있어 보였다. 그래서 동경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저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나 같은 평범으로 무장한 사람은 그저 보기나 하는 거지."
그렇게 스스로 선을 그었다. 아주 단호하게.
‘지금은 아니야.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거라며? 아직은 때가 아니지. 하고 싶다고 어떻게 다 하고 살겠어?’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뜨끔하고 올라올 때면 모른척하면서.
사건은 마흔 하고도 몇 해가 더 지나고, 원하지도 않는 한 살을 더 먹기 일보직전에 터졌다.
여느 때처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TV 연말 시상식을 보고 있었다.
맥주 캔을 따는 순간, 화면에 이찬혁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이찬혁은 요란스러운 옷을 입고 신들린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래 제목은 <파노라마>.
홀린 듯 화면을 보는데, 한 가사가 귀에 팍 꽂혔다. 아니, 뺨을 때렸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순간, 맥주가 목에 걸렸다.
컥컥대며 기침을 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잠깐, 나 진짜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당장 내일 출근길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지?
남 눈치 보고, 카드값 걱정하고, 상사 비위 맞추다가... 이렇게 늙어서 죽는 건가?
갑자기 두려웠다. 한번 조급해진 마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먼지 쌓인 기억의 서랍을 열었다.
마음속 깊은 곳, 꾸깃꾸깃 접어두었던 나의 버킷리스트.
그 맨 윗줄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연극배우 되어 보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알코올 과다 섭취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 미친 척 한번 해보자.
어차피 이번 생, 회사원 최 과장으로만 살다 가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무대 위에서라도 다른 인생으로 한번 살아보자.
꿈에 그리던 커리어우먼이 되고, 냉철한 법관이 되고, 싸이코패스도 되어 보자.
왕비가 되든 거지가 되든 그 속에서 진짜 내 얼굴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몰려왔다.
스마트폰을 열고 검색창에 입력했다.
'직장인 극단.'
엔터키를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인생의 장르가 지루한 다큐멘터리에서 우당탕탕 로맨틱 코미디로 바뀌는 순간이었다.